낯선 세상에서 만나는 두려움과 설렘
감당할 수 있는 모험의 범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모험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면 아웃도어 활동은 좀더 흥미로워진다. 나는 미지의 세계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 개의 감정, 즉 두려움과 설레임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나는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두려움이 설레임보다 일방적으로 크다면 모험을 포기하는 편이다. 그것은 내가 오롯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설레임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그저그런 여행의 하나일 뿐 나의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그 접점이 내가 감당하면서 따라갈 수 있는 모험의 궤도이다.
나는 두려움이 지나치게 나를 압도하는 것을 통제하고 두려움을 줄이고자 처음 가보는 산을, 겨울에, 혼자 야간 산행하는 것을 좋아했고 거듭했다. 비록 대부분 안전한 산행지들이지만 폭설이 내린 밤 막차를 타고 내려 지도만으로 찾아 올라간 발왕산이 그랬으며, 처음 가보는 용추계곡을 따라 밤길을 더듬어 밤새 연인산을 넘었던 일도 그랬고,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설악의 가야동 계곡 야간 산행이 그랬다. 샤모니에서 얼떨결에 찾아 들어간 트레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알피니즘의 발원지, 샤모니를 가다.
알프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샤모니에는 공항이 없으므로 가까운 스위스의 제네바나 프랑스 리옹으로 가서 샤모니로 들어가야 한다. 2013년 1월 나는 제네바에서 렌트카를 픽업한 후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을 넘을 즈음 간단한 검문이 있었지만 서행을 요구할 뿐 차를 세우거나 짐을 보자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유일한 육상 국경이라고 할 수 있는 휴전선과 비교하면 그저 옆 동네 마실 다니는 수준인 셈이다. 제네바에서 샤모니까지는 약 80km가 조금 넘는 거리로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고속도로에 접어든 지 30여 분 지나자 알프스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살레 와 그 뒤로 병풍처럼 드리운 흰산은 잘 그린 풍경화처럼 차창 밖으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샤모니가 가까워오자 검은 산에 흰 눈을 뒤집어 쓴 알프스 산군이 버티고 서있었다. 대부분 3000m 이상, 4000m 전후의 첨봉들이 즐비한 알프스의 풍경은 경외감마저 안겨주었다. 저 산을 오른 250년 전 사람들의 용기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샤모니 시내는 평일이라서 한산하였으며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미끄러웠다. 겨울 시즌인 탓에 일반 관광객보다는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노천카페 등은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번잡스러운 성수기와는 다른 분위기로, 샤모니를 둘러보기에는 더 좋은 분위기였다. 샤모니 시내에는 아르브(Arve)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르브 강은 샤모니 계곡의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 흘러 드는데, 스위스 제네바의 론 강으로 이어졌다. 강 옆으로는 아름다운 유럽풍 식당들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다.
시내 한복판 광장에는 발머와 소쉬르의 동상이 있다. 발머는 자연과학자 소쉬르(동상의 오른쪽)의 후원으로 1786년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을 최초로 오른 사람이다. 발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이 바로 몽블랑의 정상 쪽이다. 이들은 비록 수정 채광과 학술적인 목적으로 몽블랑에 올랐지만 기록상에 남아 있는 최초의 4,000m급 등정이었다.
야영지가 필요해
샤모니 시내를 둘러 본 나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몇 군데 레스토랑 문을 두들겨보았지만 성수기가 아닌 탓인지 대부분 오후에 문을 열었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지역 음식에 대한 사전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차라리 패스트푸드가 그나마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낮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에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발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으나 아쉽게도 몽블랑 정상은 구름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비수기였으므로 예약하지 않아도 잠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백패킹 장비를 모두 챙겨왔으므로 이왕이면 야영을 하기로 하고 인근의 야영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샤모니 시내에 있는 관광 안내소를 들렸다. 겨울 시즌에 운영하는 야영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안내원은 겨울 시즌에는 대부분 야영장이 문을 닫는데, 한곳이 문을 열었을 수도 있으니 직접 가서 확인해 보라며 관광지도 하나를 건넸다.
나는 차라리 산으로 오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살펴보았다. 멀지 않은 건너편 마을에 트레일 입구가 있었고 특별한 사전 정보가 없었지만 나는 무작정 트레일 입구로 가보았다. 마을 끝의 경사면으로 다가가자 샤모니 시내를 관통하던 아르브 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였다. 다리를 건너가자 간단한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침 그곳은 하이킹 코스의 들머리였다. 이렇게 쉽게 하이킹 들머리를 만나다니…. 주저 없이 차를 세우고 배낭을 꾸려 일단 푯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라가보기로 하였다.
미지의 세상
이 루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탓에 만약을 대비하여 원점회귀를 할 수 있도록 GPS의 전원을 켠 후 트랙을 기록하기로 했다. 모바일 통신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한겨울이라 트레일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트레일의 상태와 적설량을 알 수 없었기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GPS에 의지해야 했다. 침낭과 텐트, 그리고 간단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걷다가 일몰 쯤에는 야영을 할 생각이었다. 낯선 길에 들어서면서 온몸의 신경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었고 뉴런이 활기차게 요동치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오르막길은 뚜르 드 몽블랑[1] (Tour du Mont Blanc, 이하 TMB)의 루트에 포함되어 있는 벨 라샤(Bel Lachat) 롯지로 이어지며, 길게는 쁘와트 드 라파즈(Pointe de La Paz, 2313m)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였다. 물론 한겨울에는 종주가 거의 불가능하며, 간혹 스노우 슈즈를 신고 일부 구간을 걷는 여행 상품이 있다.
들머리를 지나자 곧 작은 안내 푯말이 나타났다. 이곳은 붉은 사슴(red deer) 지역이며, 사슴이 겨울을 나는 곳이므로 주의해달라는 안내문이다. 낯선 이방인의 방문이 반가울 리 없으므로 조용히 오른다. 올라가는 도중 눈 위에는 사슴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이 자주 눈에 띄었다.
길은 잘 정비된 트레킹 코스답게 평탄했으며, 급경사 길은 지그재그식의 스위치백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들머리에서 30분 정도 지나자 사람이 다닌 흔적이 눈에 덮여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서 트레킹을 하는 사람을 단 한 명 봤을 뿐 아무도 없었다. 러셀이 안 되어 있어서 무릎과 정강이로 꾹꾹 눌러가며 계속 올랐다. 눈은 깊게는 무릎 위까지 빠졌지만 급경사가 아니라서 러셀을 해나가는 데 많은 힘이 들지는 않았다.
중간쯤 오르자 조망이 트이면서 웅장한 에귀디미디[2] 전망대가 건너다 보였다. 트레킹 코스는 아르브 강을 사이에 두고 에귀디미디와 몽블랑을 마주보고 있었다. 눈에 가려진 트레일이 분명치 않았고, 러셀을 하면서 오르는 걸음은 더디었다. 게다가 점심 무렵에 출발하여 정상부까지는 다다르지 못하였다. 이 길로 이어진 쁘와트 드 라파즈 정상부는 넓은 구릉지가 펼쳐져 있는 곳인데 구릉지의 초원에 붉은 사슴이 뛰놀고 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환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눈 길 위에서의 야영
현지의 일몰 시간은 대략 여섯 시쯤이었지만 초행길이고 러셀이 되지 않은 눈 덮인 산길을 야간 산행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모험은 여기까지였다. 일몰이 시작될 무렵 운행을 중단하기로 하고 적당한 막영지를 찾았다. 그러나 산 중턱이므로 텐트를 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다행히 눈이 많이 쌓여 비교적 완만한 곳에 쌓인 눈을 치우고 눈삽으로 다진다면 작은 텐트 한 동을 설치할 수 있을 듯했다.
루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가운데 오른 이곳이 어디쯤인지, 변화무쌍한 날씨는 폭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비록 눈사태 우려가 없어 보이는 완만한 설사면이었지만 약간의 불안감이 들었다. 현대적 의미의 알피니즘의 핵심 가치가 곤란성과 불확실성에 맞서는 태도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 초보 수준의 알피니즘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야영을 준비하였다.
변화무쌍한 구름은 에디귀미디 전망대를 순식간에 가렸다가 다시 보여주기를 반복하였다. 마주 보이는 몽블랑으로 이어진 산 능선에 석양빛이 내려앉는다. 그 아래로는 넓게 빙하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250여년 전의 어느 날처럼 저 멀리 발머와 파카드가 느린 걸음으로 빙하지대를 통과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치우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눈은 파우더 같아서 쉽게 다져지지 않았고 여러 번 눈삽으로 눌러 주어야 했다. 눈을 치우고 텐트 설치를 마치자 완전히 어두워졌다. 일몰 전에 야영 준비를 마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동화책 속으로 들어오다.
어둠이 찾아오자 산 아래 마을에 하나 둘 불빛들이 켜지고, 불빛은 모여 산불처럼 보였다. 이 시각 저곳은 따뜻한 거실 TV에서 저녁 뉴스가 흘러나올 것이고, 몇몇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현지에서 입맛에 맞는 식량을 보급하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출국하기 전 누룽지와 알파미를 가져갔으며, 쉽게 끓이거나 미지근한 물만으로도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포장재를 해체하여 지퍼 백에 담아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가져온 젓갈과 무장아찌를 이전 숙소에서 두고 온 탓에 고추장만을 반찬으로 하여 라면을 먹게 되었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었다. 생각해보니 오전에 샤모니에서 먹은 햄버거가 오늘 식사의 전부였던 것이다.
준비해간 식수는 1리터뿐이었는데 운행 중에 일부를 마시고 나머지는 라면 끓이면서 다 소비하였다. 휴대용 정수기를 가져갔으나 이물질이 보이지 않아 정수하지 않은 채 그냥 마셨다. 알프스의 눈을 녹인 물은 그 어떤 청정 생수보다도 달디 달았다.
눈을 녹여 물을 만들고 누룽지를 끓여 입을 개운하게 하였다. 다시 한 번 지난 밤 숙소에 두고 온 젓갈과 무장아찌가 그리웠다. 뜨거운 누룽지와 숭늉으로 배를 채우고 몸을 덥힌 후 잠시 텐트 밖을 나가보았다.
텐트 밖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푸르스름한 산란광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고 희미한 구름 띠가 산중턱에 걸려 있으며, 그 아래 산불처럼 타오르는 듯한 사람 사는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손을 뻗어 툭 치면 펄럭일 것만 같은 대형 걸개그림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는 갑작스럽게 짙은 운무로 주위를 덮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대기의 입자들이 빛에 부딪혀 형형색색으로 사위를 물들였다. 그 현란한 색으로 마치 오로라의 한복판에 있는 듯했다.
그동안은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잠이 부족했으나 알프스의 산 속에서 오랜만에 길고 단 잠을 잤다. 간밤에 소록소록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행히 큰 눈은 아니었다. 대기는 어제 저녁과는 또 다른 색상으로 아침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텐트 안의 물이 살짝 언 것으로 보아 아침 바깥 온도는 대략 영하 5도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정을 이유로 이쯤에서 하산하기로 하고 자리를 정리하였다.
아무리 인기 있는 트레킹 코스라고 하지만 한겨울에는 오로지 짐승들의 차지인 모양이다. 텐트를 철수하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단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았다. 비록 전 구간을 산행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오롯이 걸을 수 있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새로 눈이 내린 산길에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나있었다.
계획에 없었던 1박2일의 짧은 백패킹을 마치고 샤모니를 빠져나오는 길 주유소에서 잠시 에귀디미디를 다시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몽블랑은 구름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오라는 뜻으로 보였다. 좀 더 많은 준비를 하여 언젠가는 클라이밍과 TMB 종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알프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기에 멀지 않은 꿈이리라.
[1] TMB는 몽블랑 주변 산군으로 이어진 160km의 종주 트레킹 코스로서 전 세계의 많은 하이커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2] 에귀뒤미디(Aiguille du Midi, 3842m). ‘한낮의 바늘’이라는 뜻으로 샤모니의 프랑스, 이탈리아 접경지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