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트레일, 그 가능성에 대해서
※ 이 글은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장거리 트레일이 기준이 되는 길이는 전세계적으로 합의된 기준이 없다. 위키피디아의 ‘Long-distance trail’ 항목에서는 “50km 이상이지만, 대부분은 수백 마일 이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 국립공원 관리청의 ‘National Park Service Programs’ 문서에서는 국립 경관 트레일(National Scenic Trail)을 100 마일(160km) 이상의 연속적이며, 차량이 다니지 않는 루트로 정의하고 있다.[1] 넓은 국토와 오지가 많은 미국의 자연환경이 반영된 것이므로 이 역시 장거리 트레일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장거리 트레일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연속성’을 들 수 있는데, 연속성이라 함은 단지 물리적인 연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리적인 연결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길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모든 길을 무슨무슨 트레일이라고 이름 짓고, 똑같은 하나의 길을 연결 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혼란에 빠진다. 물리적인 연속성 이외에 역사, 문화, 지형적으로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 일련의 연결된 길을 장거리 트레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백두대간이 그런 사례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한반도의 가장 큰 산줄기를 따라 연결한 트레일이다. 말하자면 지형적으로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 트레일의 연결인 것이다.
장거리 트레일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당일 하이킹으로 다 걸을 수 없는 정도의 거리이다. 그래서 흔히 장거리 트레일의 거리 기준을 50km 이상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1일 하이킹 거리는 20km에서 30kn 정도이므로 50km 이상의 장거리 트레일은 당일 하이킹이 아닌 멀티 데이 하이킹, 즉 백패킹 스타일로 걸어야 한다. 이 책에서도 장거리 트레일이라고 했을 때 백패킹 방식으로 걷는, 50km 이상의 연속된 트레일로 정의한다. 앞서 설명한 공통적인 특징과 물리적 거리라는 조건을 모두 반영하여 장거리 트레일을 정의하자면 아래와 같다.
전체 길이 50Km 이상의 역사, 문화, 지형적인 공통 특징을 갖는 일련의 연결된 길
먼저 우리나라의 장거리 트레일 현황은 어떠한가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들어 국민들 사이에 걷기 열풍이 일어나면서 걷기가 전통적인 등산 활동에 버금가는 레저 활동이 되었다. 이에 따라 관련 부처나 각 지자체에서도 트레일 조성 붐이 일었다. 걷기 트레일은 대부분 도심이나 마을로 이어져 접근성이 뛰어나고, 등산에 비해 비교적 안전하며, 남녀노소 국민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유행은 어디에서나 부작용을 동반하는데 실적 위주의 경쟁적인 트레일 조성은 자치 단체장의 생색내기에 불과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접근성에 대한 검토나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없이 조성된 트레일은 이후 유지 관리가 되지 않아서 아무도 찾지 않는 황폐한 길이 된 경우도 많다. 다른 지역의 방문객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 마저도 외면하고 차라리 강변의 아스콘 포장길을 걷거나 뛰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으며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길은 역사 문화적 스토리 텔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장거리 트레일은 제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그리고 해파랑길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거리 트레일은 제주올레길이다. 2007년 9월 시흥초등학교에서부터 광치기 해변까지의 제1코스 15km가 연결된 이래, 현재 모두 26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는 425km이다. 제주도 특유의 이국적인 풍경과 군데군데 오름을 연결하고 해변으로 이어지는 트레일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2008년 전북 남원 산내면과 경남 함양군 휴천면 세동마을을 잇는 20km 구간이 시범적으로 운영되면서 2012년 22개 구간 274Km이 모두 연결되어 걷기 열풍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리산 둘레길은 남한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세를 가진 지리산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마을과 마을을 잇는 트레일의 모범 사례라는 점에서 한국 트레일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 해변길,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750km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장거리 트레일이다. 전체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지자체나 민간 차원에서 조성한 트레일 이외에도 국가 산림자원을 관리하는 산림청은 ‘숲길’이라는 명칭으로 트레일을 통합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법률 제23조의3’에는 ‘산림생태적,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아 체계적인 운영 관리가 필요한 숲길에 대해서 산림청장은 국가숲길로 지정 고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산림청이 현재 관리하고 있는 숲길은 백두대간 총 681km 중 국립공원공단에서 관리 중인 261km를 제외한 백두대간 마루금 420km, 서울둘레길 157km, DMZ펀치볼 둘레길 73km, 인제-홍천간 백두대간 트레일 158km, 대관령숲길 88km, 금강소나무숲길 79km, 속리산둘레길 182km, 내포문화숲길 319km, 지리산둘레길 295km, 한라산둘레길 66km 등 모두 10개의 트레일을 관리하고 있다.
2012년까지 DMZ 트레일 325km, 낙동정맥 340km, 서부종단 총 876km, 남부횡단 총 682km를 정비하여 관리할 계획이며, 그외에도 5대 명산 둘레길인 설악산둘레길 350km, 지리산둘레길 274km, 속리산둘레길 250km, 덕유산둘레길 200km, 한라산둘레길 80km를 정비할 계획이다.
숲길은 등산로와 트레킹길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산림문화 휴양에 관한 법률’ 제22조의2(숲길의 종류)에서 숲길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5개로 정의하고 있다.
등산로: 산을 오르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활동(등산)을 하는 길
트레킹길(둘레길과 트레일): 길을 걸으면서 지역의 역사·문화를 체험하고 경관을 즐기며 건강을 증진하는 활동(트레킹)을 하는 길
레저스포츠길: 산림에서 하는 레저·스포츠 활동(산악레저스포츠)을 하는 길
탐방로: 산림생태를 체험·학습 또는 관찰하는 활동(탐방)을 하는 길
휴양·치유숲길: 산림에서 휴양·치유 등 건강증진이나 여가활동을 하는 길
'산림문화 휴양에 관한 법률’에 따른 숲길의 종류에 따르면 장거리 트레일은 등산로와 트레킹길에 해당될 것이다.
국가숲길 네트워크를 추진하고 있는 산림청은 ‘전국 숲길 네트워크를 구축을 통한 통합 관리’, ‘산림생태벨트 구축’, ‘주요 산림지역의 산림생태계 보호’, ‘산림자원과 야생 동식물, 지역주민, 이용자가 공존할 수 있는 가치 발굴’, ‘주요 등산로 이용 압력의 분산’ 등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숲길 네트워크 추진 사업에 포함된 장거리 트레일에서는 백패킹을 고려한 사업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 트레일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부터 구간별 당일 하이킹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논리적 배경은 거점 마을을 잇는 구간별 거리가 당일 하이킹으로 가능한 거리라서 야영장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야영장 부지 확보와 야영장을 설치한 후 예상되는 유지 관리의 실무적 어려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책 담당자들의 야영 활동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야영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이틀 이상 머물며 연속해서 걷는 백패킹의 필수 행위이다. 뒤에서 살펴볼 미국 국립 트레일 시스템에서도 트레일 관리의 목적에 하이킹 뿐 아니라 캠핑을 포함하고 있다. 단지 걷는 행위, 즉 하이킹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특히 장거리 트레일은 그 의미가 반감된다. 백패킹은 일상적인 생활 환경을 벗어나 야생의 자연 환경 속에서 먹고 자고 걷는 행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과정으로 국민 건강 증진 뿐 아니라 심신의 휴식과 치유를 위한 가장 복합적인 아웃도어 레저 활동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연의 위대함과 교감하는 체험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트레일은 모두 구간별 당일 하이킹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심지어 수백 km라고 홍보하는 장거리 트레일 조차 야영 활동이 포함되는 백패킹 방식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 트레일이 주는 극적인 경험과 교육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규모가 큰 백패킹 관련 커뮤니티의 회원수가 약 9만명에 이르고,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고 활동하는 동호인들을 포함하면 우리나라의 백패킹 동호인은 대략 20만명 쯤으로 추정된다. 백패킹을 허용하지 않는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동호인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백패킹 동호인들이 주말마다 마주쳐야 하는 현실은 산림보호법, 자연환경공원법, 자연공원법, 하천법 등 촘촘하게 둘러싸고 있는 법적 규제이다. 지금과 같이 관련 법규의 사각지대에서 이루어지는 국민들의 아웃도어 레저 활동은 오히려 더 심각한 환경적인 문제나 산불 등과 같은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 백패킹 동호인의 실재를 인정하고 하루빨리 제도권 안에서 공론화시켜 국가숲길 사업 계획에도 반영되어야 한다. 유지 관리 비용이 가장 적게 들며, 가장 친환경적인 아웃도어 활동으로서 백패킹 문화를 육성하는 것은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삼림자원을 활용한다는 목적에도 부합되는 정책이다.
(이어지는 글은 '미국 국립 트레일 시스템'입니다.)
[1] These routes are primarily non-motorized continuous trail and extend for 100 miles or more. The routes traverse beautiful terrain, and connect communities, significant landmarks and public lands.(National Park Service 웹사이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