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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Feb 09. 2021

나의 첫 지리산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 쌓인 저 산만 보면.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가슴에 굽이친다

-김지하, 지리산



가지산에서 바라본 지리산. 남쪽 산 어디에서나 지리산이 보인다.


사람을 품는 산

내가 처음 지리산에 간 것은 1985년 3월 초였다. 서클 룸과 학교 앞 술집만을 전전하며 1학년을 보낸 후 더이상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음을 느끼던 즈음이었다. 나는 겨우 1년만에 대학 생활이 무료해졌고, 리셋하고 싶었다. 몇몇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휴학을 알리고 남들은 수강신청이다 뭐다 정신 없을 때 나는 비둘기호에 올라 구례로 향하였다. 지리산을 향하던 당시 나의 등산 복장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히 가관이었다. 남대문 상가 등산용품점에서 구한 무지막지하게 큰 배낭에 족히 4kg은 되었을 화이바 글라스 폴대로 세우는 3인용 텐트, 카시밀론 사각 침낭, 쌀과 감자, 꽁치 통조림, 유리병에 든 김치 따위로 아마 배낭 무게는 30kg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게다가 운동화 차림이었다. 어머니께서 고3 체력장 잘 보라고 사주신 언감생심 '프로스펙스’라는 나름 브랜드 운동화였다. 3월이면 눈도 다 녹았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수행 기차를 타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섬진강을 따라 오수, 옹정, 압록으로 이어지는 기차역은 참으로 아름다우니 그 역 이름만 들어도 나는 멀리 여행을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차는 느렸고, 창가 햇살은 나른했다. 역마다 쉬어가는 비둘기 열차는 부지런히 산골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나는 봄 햇살에 취해 그들은 바라보며 한껏 기차 여행을 즐겼다. 출발 느낌은 아주 좋았다. 


나는 낯선 곳 구례역에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렸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이렇게 멀리 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이라고는 동네 뒷 산 밖에는 가본 적이 없었으나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이 한편으로는 듬직했다. 나는 낯설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첫번째 산행에서 의기소침해지지 않으려고 과도하게 어깨를 펴고 산악인 코스프레를 하면서 역사를 빠져나갔다. 혹시나 나와 비슷한 처지로 지리산행을 하는 등산객이 있었으면 덜 외롭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평일이였으므로 역은 한산했다. 


어설픈 산꾼

구례역 앞에서 화엄사행 버스를 탔다. 버스 기사는 산꾼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집채만한 배낭에 쩔쩔매는 나를 데면데면 쳐다 볼 뿐이었다. 구례에서 운봉이나 인월로 넘어가는 성삼재 구간 도로가 1988년에 생겼으니 그때의 지리산 종주는 의례 화엄사 계곡에서 시작해야했다. 눈도 없고 꽃도 없는, 겨울 지나 봄이 오기 전의 산이 그렇듯이 지리산의 첫 인상은 다소 무미건조하였다. 괜히 왔나 싶기도 했지만 풍광을 보러 온 것은 아니므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지리산의 뱀사골이나 한신계곡, 칠선계곡 등에 비하면 화엄산 등산로는 재미없긴 하다. 평일이었으므로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이 어설픈 산꾼은 술 담배에 찌든 몸을 이끌고 노고단으로 올랐다. 어찌어찌하여 노고단까지는 올랐지만 지리산의 첫번째 산행은 거기까지였다. 화엄사 계곡을 다 올라 능선상에 이르니 이미 겨우내 녹지 않은 눈이 발목을 차고 들어왔다. 하물며 목이 없는 운동화 차림이었으니 이미 양말이 다 젖어서 질퍽거렸다. 제 아무리 프로스펙스라고 해도 지리산에서는 불량스럽기까지 한 흰 운동화 차림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산꾼을 만나다.

능선에 오르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정도로 지리산 종주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운동화는 말리면 될 일이었다. 첫날 밤을 지낼 노고단 산장을 찾아 들어갔다. 등유 램프로 겨우 사물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겨울 끝자락의 노고단 산장에는 등산객이라고는 나혼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리산 주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산장인데다가 아직 한창 겨울이었기에 산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이런 정도의 쓸쓸함은 오히려 멋있어 보였고, 즐길만 한 것이었다. 


나는 싸구려 양주 네폴레옹을 꺼내서 소시지를 안주 삼아 홀짝 거리고 있었다. 그때 마치 예티처럼 거대한 사람이 산장 문을 삐거덕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가 문은 열고 들어올 때 그 실루엣만으로도 그가 나와는 달리 제대로 된 산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배낭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그의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고, 차 바퀴에 깔려도 무사할 것 같은 비브람 중등산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안 사실이지만 그가 메고 있던 배낭은 로우 알파인 제품이었고, 나는 그 강렬한 첫인상 때문에 한동안 로우 알파인 배낭을 갖는 게 꿈이었다. 남대문의 등산 장비점에 몇번이나 기웃거려 보았지만 당시 내가 살만한 가격은 아니어서 끝내 가져보지 못했다. 잘 부풀어 오른 다운 자켓은 더 멋져 보였다. 


나는 적당한 수준의 쓸쓸함을 즐기는 것도 괜찮았지만 첫 지리산에서 첫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딱 보기에도 대단한 산꾼 같았고, 내가 가야할 천왕봉 쪽에서 오는 길이었으므로 몇가지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월간 산 잡지에 딸려 온 지리산 지도 한 장을 달랑 들고 왔을 뿐이었다.


프로스펙스는 안돼!

나는 고분고분하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지리산은 처음이고, 침낭은 무엇이며, 먹을 거는 이렇게 챙겨 왔노라고 배낭까지 까 보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너그러운 표정의 그는 끄덕끄덕 하면서 내 얘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짧게 한마디 하였다.


“내일 저랑 같이 하산하시지요!”


중산리에서부터 천왕봉으로 해서 종주를 마친 그는 능선 위에는 거의 무릎까지 눈이 쌓여 있다며 자신의 무릎을 가르켰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슬그머니 나의 프로스펙스 운동화가 그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마루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다고 못봤을 리 없는 그는 나에게 아이젠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는 게 먼저인지, 그게 뭐냐고 묻는 게 먼저인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내일 화엄사로 내려가는 같이 내려가는 게 좋겠어요.”


그는 재차 권고하였다. 나는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지리산은 고사하고 산다운 산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다니 혼자서는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산행 계획이었다. 그렇게 그날 밤 나는 약간은 낙담한 기분으로 남은 나폴레옹을 그와 함께 비우며 노고단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지리산에 얽힌 시시한 첫 경험담이다. 


지리산 매니아

같은 해 여름, 나는 이것저것 장비도 추가로 구입하고, 산악 잡지도 열심히 읽은 후 다시 지리산 종주를 시도했고 감격스러운 첫 종주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맺은 지리산과의 인연은 그후로도 계속되어 해마다 두번씩은 종주 산행을 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 이제는 제법 그럴듯하게 배낭도 꾸릴 줄 알고 단독 산행의 맛에 중독되어가던 때였다. 지방의 작은 공장에 다니고 있던 나는 주말 서울에 오는 날이면 늘 야간산행으로 북한산에 올라 야영을 한 후 새벽 백운대 일출을 보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는 아무데서나 야영이 허용되던 시절이었는데, 깔딱고개를 넘을 때 쯤 숲 속 야영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 목소리를 신기해 했었다. 그것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인수봉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야영을 하는 곳이었다.


첫 지리산 종주를 했던 해로부터 5년이 지난 1990년 지리산 종주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뱀사골에서 시작하였다. 내가 다녀간 그 이듬해 고정희 시인이 그만 급류에 휩쓸려 운명을 달리했던 그 계곡이다. 남원으로 해서 뱀사골 계곡 입구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3월 14일 첫날은 뱀사골 산장에서 묵기로 했다. 꽃샘 추위도 끝자락만 남아 봄기운이 완연한 3월 중순이었지만 지리산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텐트를 가져갔지만 산장에서 묶기로 하였고 저녁 식사를 해먹을 때까지만 해도 산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도 없고, 꽃도 없는 때라서 3월의 산행이라는 게 늘 볼품은 없다. 게다가 지금 달력을 들쳐보니 1990년의 3월 14일은 수요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저녁을 먹고 단독 산행 때 늘 그랬듯이 데친 쏘세지를 안주삼아 나폴레옹을 혼자 비우고 있는데 역시나 산더미만한 배낭을 들쳐 메고 한 사내가 산장에 들어섰다. 행색을 보아하니 그도 종주를 할 참이었다. 그는 마산에서 온 공장 노동자였다.


1990년 지리산 제석봉


번잡스러운 것도 싫지만 종주 내내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는 것도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말을 걸었고 다음날 같이 종주길에 오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일행이 늘었다. 화엄사쪽에서 올라왔다는 대학생 두 명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군입대 영장을 받아둔 상태로 뭔가 멋진 추억을 만들어보고자 지리산에 오른 것이었다. 두 학생 중 하나는 사진 서클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FM2라는 수동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난 그때 그 학생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 아, 이게 사진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두 학생의 행색은 5년전, 그러니까 내가 처음 지리산에 오를 때의 그 행색이었다. 다만 그들은 그래도 등산화는 제대로 챙겨 신고 있었으니 나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다.


넷이 된 일행은 뱀사골 산장에서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눴지만 무슨 얘기였는지는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90년이었으므로 마산의 노동자는 아마도 노동운동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공장에 들어온지 이제 갓 2년 된 나 역시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조선대의 두 학생은 광주항쟁에 대해서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했던 것은 기억이 분명하다. 


느닷없는 지리-덕유 연속 종주

그렇게 낯선 네 명의 사내들은 의기투합하여 다음날 본격적인 종주길에 오르게 된다. 애초 두명의 대학생은 그저 노고단 쯤에서 사진이나 몇 컷 찍고 내려갈 계획이었으나 나와 마산에서 온 노동자의 꾐에 빠져 종주길에 함께 나서게 된 것이다. 평일의 연하천 산장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연하천 산장에서 두번째 밤을 지낸 후 천왕봉에 올랐고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다.


참 지금 생각해도 팔팔했던 모양이다. 나와 마산의 노동자는 이왕 나선 김에 덕유산 종주도 어떠냐고 유혹하였고 못내 망설이던 두 대학생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백무동으로 하산하여 민박을 한 후 3월 17일 남덕유산으로 향하였다. 내 키를 훌쩍 넘는 집채만한 배낭을 지고 지리산 종주 45km를 마친 후 연이어 덕유산 28km 종주에 나섰으니 참으로 두려울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운 삿갓재

덕유산 삿갓재. 지금은 대피소가 들어선 자리이다.


그렇게 해서 영각사쪽에서 남덕유로 오른 후 삿갓재, 지금은 그럴듯한 산장이 들어선 자리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삿갓재는 덕유산 종주에서 많은 종주 산행객들이 하루 묵어가는 곳이었다. 능선에서 50m 아래 샘이 있고 텐트 십여 동을 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텐트를 치고 샘으로 내려가 물을 길어오고 하는데 느닷없이 바람이 거세지면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나와 마산의 노동자는 겨울 산행에 맞는 준비를 해온 탓에 특별히 긴장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의 침낭은 얇은 사각 침낭이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 속에서의 경험도 없었다. 둘 중 좀더 소심해보이던 학생은 그만 울먹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학생을 진정시킨 후 야영 준비를 마치고 텐트 안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내 텐트도 2-3인용이었고 마산의 노동자가 준비한 텐트도 2-3인용이었다. 우리는 둘씩 나눠 텐트에 들어갔고 학생들에게는 플리스 자켓과 오버트라우저, 매트리스 등을 주고 보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겨울 야영에서 가장 취약한 곳, 발에는 빈 배낭을 끼어 넣었다. 다행히 눈보라가 치긴 했어도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흥미진진한 밤을 보내고 다음날 텐트를 열어 밖을 내다본 순간 우리 모두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온 산에 눈이 덮였고 나뭇가지마다 설화가 만발했던 것이다. 강설량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겨울산으로서의 풍치로는 충분하였다.


네 명의 사내들은 그렇게 해서 무사히 향적봉을 거쳐 종주를 마치게 되었다. 덕유산하산길에서는 늘 그랬듯이 백련사 아래 송어집에 들려 오렌지 빛깔의 속살을 가진 송어회와 소주로 지리산 덕유산을 잇는 종주를 마무리하였다.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오랜 운동으로 완전하게 이완된 몸뚱아리에 술을 부어넣는 것은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나른함이란 오르가즘에 비할 바 아니었다.

덕유산 종주 능선길.

각자 집으로 돌아간 후 사진반의 대학생은 직접 암실에서 작업한 흑백사진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그 사진들은 수십 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도 1990년의 지리산을 정지시킨 채 내 기억 속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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