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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Feb 10. 2021

프롤로그: 인사이드 아웃도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정

스무 살 무렵의 첫 지리산행. 그때 나는 능선 들머리에서 결국 열패감을 안고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첫눈에 반한 그 넓은 품을 잊지 못해 나는 결국 다시 산에 들어섰다. 그리고 파란 서쪽 겨울 하늘에 살짝 걸린 눈썹 같은 초승달과 동행했던 눈 쌓인 설악 서북능, 처음으로 오른 인수봉과 거기서 내려다본 잊을 수 없던 서울 풍경,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앞에 섰을 때의 그 경외감, 2주일을 걸어 휘트니 산 정상에서 맞이한 구름처럼 몰려오던 먹먹함과 묵직한 감동은 아직도 여전하다.


이 책은 다른 내세울 이력은 딱히 없으나 나의 35년간의 아웃도어 경험과 10년간의 아웃도어 비즈니스 현장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각각 흩어져 있는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들이지만 서로 어떤 사회적 연관성을 가지는지 원고를 정리하면서 좀더 명확해졌다. 어렴풋이 존재할 거라고 짐작했던 연관성이야말로 그 흩어져 있던 파편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낸 계기다.


독자들도 많은 아웃도어 경험 속에서 저마다 감격스러운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아웃도어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낭을 꾸릴 때 가장 행복해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여전히 그렇다. 매번 반복되는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오래된 질문 역시 책을 펴내게 된 동기의 하나다. 


오래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점점 더 먼 과거로 돌아가 보았다. 내가 산에 들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의 회상만으로는 그 답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발길이 마침내 동아프리카의 사바나에 이르렀고, 다시 천천히 거슬러 올라왔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오늘날의 아웃도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기원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현대 아웃도어 비지니스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었다. 어느 대목에서는 발걸음이 빨라서 중요한 이정표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경우도 있을 것이다.


‘1부 기원’에서는 진화인류학 관점에서 우리 안의 아웃도어 본능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를 찾고자 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걷고 있는지, 인류의 직립보행이 오늘날의 아웃도어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인류는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하면서 자유로운 두 손과 두 발로 저 멀리 미지의 세계를 가리킬 수 있었다. 아웃도어 활동은 한마디로 현생 인류의 진화 재연극(再演劇)이며, 본질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정이다. 


‘2부 인사이드 아웃도어’에서는 1960년대에 맹아 단계에 시작해 2000년대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성장한 현대 아웃도어 비즈니스를 소비자가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살펴본다. 아웃도어 트렌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웃도어 브랜드의 성장과 아웃도어 트렌드의 파도 너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시대의 흐름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웃도어 비즈니스 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접할 수 있는 현대 아웃도어 비즈니스가 어떻게 태동하고 성장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와 많은 자료들을 이 책에 고스란히 정리해 담았다. 


‘3부 장비 개발’에서는 나일론과 폴리에스터도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장비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종로5가와 동대문, 방산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공부하고, 결국 머릿속에 그리던 장비의 모습이 현실화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아웃도어 장비 개발자로서 겪었던 여러 시행착오들과 환희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아웃도어 마니아들에게 장비는 단순히 상품의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아웃도어 장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단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일만큼이나 흥미롭고 두근거리는 일이 될 것이다.


‘4부 브랜드 이야기’는 ‘제로그램’의 설립자로서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의 기록이다. 지난 10년간 나는 아웃도어 브랜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직접 느끼고 경험했다. 브랜드는 신화나 전설처럼 대중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 설립자의 욕심이나 투자자의 돈 계산으로는 절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멋진 브랜드들이 어떻게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는지 살펴봄으로써 ‘브랜드’에 대한 좀 더 지혜로운 시선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5부 지구와 더불어’는 아웃도어 세계에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환경 이야기다. 나는 투철한 환경주의자가 아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저 산에 버려진 쓰레기들, 야영 다음 날의 남겨진 음식물들, 그런 아웃도어 활동 속에서 겪게 되는 불쾌한 경험들을 못 견딜 뿐이다. 또 ‘생활 백패커’에서 아웃도어 비즈니스를 운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환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속가능한 아웃도어를 위한 자연환경이 전제되어야 비즈니스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마니아들이 이제는 ‘생활밀착형 환경운동가’가 되어 모두 더 오래 아웃도어 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6부 길 위에서’는 35년간의 아웃도어 경험 중 잊을 수 없던 순간을 담은 나의 아웃도어 활동기다. 누구에게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여행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걷기’와 ‘오르기’에 국한되어 있지만 나 역시 그런 기억들이 있으며, 여전히 아웃도어 비즈니스의 한 자락에 머물고 있는 지금 그 기억들은 나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다. 아웃도어 제품은 길 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7부 질문하는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길 위에 있으나 부족한 나를 늘 각성시켜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영감을 제시해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쓰는 내내 나의 화두는 ‘연결’이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연결 고리들을 통해 나는 오늘날의 아웃도어 마니아들 역시 장구한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으며, 복잡한 사회현상의 한 정점에 있음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현상들을 완벽하게 연결하지 못했고, 어떤 징후들에 대해서는 내 인식이 부족해 미처 그 고리를 알아낼 수 없었다. 내 성찰의 수준은 여기까지이며, 아직 길 위에 있다. 모든 것은 방향성이다. 내가 보았던 이정표는 곧 내 등 뒤로 멀어질 것이고, 나는 또 다른 이정표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도 그러하다. 


오늘은 산을 오르고 숲을 걷는 대신 이 책과 함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인류의 아웃도어 여정을 독자들과 동행하고 싶다. 감히 제안하건데, 하루 정도는 종아리 근육을 쉬게 하고 뇌 근육을 활성화시켜보자. 문 밖을 향한 시선을 잠시 거두어 내면을 들여다보자. 우리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는지, 그 미지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지. 


2021년 2월, 경이로움의 한 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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