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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Feb 19. 2021

어느 날 문득 거기, 노스 캐스케이드 트레일

독수리 둥지에서 캐스캐이드 산맥을 내려다 보다

어느날 문득 거기 

모든 여행 계획이 주도면밀한 것은 아니다. 2014년의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North Cascades National Park) 백패킹이 그러했다. 그해 7월, 백패커 매거진(Backpacker Magazine)의 기사 하나가 내 시야를 벼락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래 인용문에 원문 기사 링크)


"America’s Best Campsites"
-Park your tent in one of these 10 spots, and you'll be happy in the morning. Guaranteed.


미국의 백패킹 야영지 베스트 10을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행복한 아침을 보장한다니…. 그게 발단이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순위를 매기지 않았겠지만 첫번째 소개한 장소가 바로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의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Sahale Glacier Camp)였다. 국내에서는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생소한 곳이었지만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이곳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길을 나서기로 작정하였으니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낯선 길을 함께 걸을 ‘트레일 버디’를 규합하였다. 경험상 미국이란 나라는 아무리 자료를 많이 조사해도 백문이 불여일견인 나라다. 교통과 통신 인프라, 거리 감각 등이 우리네와는 완전히 달라서 객관적인 자료마저 평소의 익숙한 주관적인 감각으로 왜곡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

노스 캐스케이드가 속한 워싱턴주는 캘리포니아주에 못지않은 아웃도어 활동의 천국과 같은 곳이다. 특히 깊은 캐스케이드 산맥에는 모세혈관처럼 크고 작은 트레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노스 캐스케이드 지역 트레일만을 소개하는 단행본도 10여종에 이를 정도이다. PCT의 마지막 구간도 워싱턴주를 관통하여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진다.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사할리 피크이며, 그 아래 빙하 지대 하단에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가 있다.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는 해발 2,343m로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에서 가장 높은 야영지이며, 험준한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환상적인 전망을 가진 곳이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면도칼같은 봉우리의 바다를 내려다 보는 전망은 그동안 내가 보아온 많은 야영지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운이 좋다면 산양(mountain goat)이 슬그머니 텐트 곁으로 다가오는 멋진 경험을 얻을 수도 있다.


야영지는 캐스케이드 패스와 사할리 암 트레일(Sahale arm trail)이 끝나는 지점에 있으며, 돌 더미를 쌓아 만든 야영 사이트는 6개 밖에 없다. 야영 사이트 뒤로는 빙하 지대가 있고, 그 너머로 사할리 산(2,650m)이 버티고 서있다. 사할리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안전벨트와 보조 자일 등의 기본적인 등반 장비가 필요하다. 야영은 사전 허가(퍼밋)가 필요하며, 퍼밋은 선착순이고 무료이다. 마블 마운트(Marble mount)의 윌더너스 인포메이션 센터(Wilderness Information Cetner)에서 퍼밋을 받을 수 있다.


천상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사할리 암 트레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아름다운 트레일과 비현실적인 조망을 가진 야영지임에도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트레일 입구와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는 마블 마운트까지는 시애틀에서 불과 2-3시간 거리이며, 트레일의 길이는 약 10km로서 오전에 출발한다면 일몰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비교적 캐주얼한 트레일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백패커 매거진 기사를 읽은 지 3개월 후, 그러니까 2014년 10월 초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이 팀을 이루어 미지의 세계 노스 캐스케이드로 향하였다. 트레일 버디는 월간 마운틴 편집장을 지내고 리프레시 시간을 가지고 있던 대훈, 백패킹 경험이 거의 없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재헌, 그리고 항상 재치가 넘치며 상황 판단력이 빠른 늙은 막내 기정 이렇게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이었다.


시애틀 공항에서 미리 예약해둔 렌트카를 픽업한 후 시애틀 시내의 REI에 들려 부족한 장비를 구입하였다. 마블 마운트로 가는 길에 렌트카의 타이어가 펑크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한국에서 출발한지 불과 20여 시간 만에 캐스캐이드 산맥의  깊숙한 곳, 마블 마운트에 도착하여 사설 야영장에서 첫날을 보냈다. 윌더너스 센터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오후 4시 30분에 업무가 종료되기 때문에 다음날 일찍 퍼밋을 받기로 하였다. 아직은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산맥들의 실루엣 너머로 가끔 유성이 길게 곤두박질쳤다. 약간은 상기된 기분이었지만 일찍 잠을 청했다.


새벽...지표면 저 아래까지 꺼져있는 듯한 무거운 의식을 다시 끌어올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음...오늘도 텐트 안이군 이렇게만 생각했지 미처 미국이라고는 깨닫지 못했다. 침낭 속에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길 몇 초가 지나서야 이런, 여긴 미국이고 오늘은 서둘러 퍼밋을 받아야 어제 진행하지 못했던 일정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텐트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미지의 세계 문턱에서 우리들의 뉴런도 아침부터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영 퍼밋 

마블 마운트의 윌더너스 인포메이션 센터는 우리가 첫날밤 머문 캠핑장에서 불과 2km 남짓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 전지역의 퍼밋을 발급한다. 목적지인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는 단 6개의 야영 사이트가 있는 곳이고, 퍼밋은 선착순이었으므로 우리는 아침 일찍 서둘러 업무 시작 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추어 센터를 방문하였다. 관료적인 느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센터의 레인저는 친절하게 전날 정상 부근에는 눈이 왔으므로 주의하라고 한다.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의 모든 백컨트리 야영장은 무료이며, 선착순으로 퍼밋을 발급한다. 입지가 좁은 우리나라의 백패커들에게는 무척이나 부러운 제도와 환경이다. 


지그재그식 스위치백을 올라서면 시야가 터지면서 장쾌한 조망을 선사한다.

해발 1,000m 지점의 트레일 헤드에는 분뇨를 생분해하는 방식의 친환경 화장실과 주차장 시설이 있을 뿐 관리사무소나 매점 등은 없었다. 멀리 능선 위로 빙하를 이고 있는 험준한 봉우리들이 올려다 보였다. 시간을 봉인한 채 협곡 사이에 켜켜이 쌓인 빙하는 늘 신비롭다. 오전 11시쯤 도착한 트레일 헤드에서 배낭을 다시 정비하고 길을 나섰다.다소 들떠있던 우리는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숲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출발은 지그재그식의 스위치백으로 시작되었다. 수십 미터 높이로 미끈하게 자란 소나무 숲을 헤치고 6km를 걸어가자 마침내 조망이 터졌다.


헬로, 블랙 베어

스위치백의 숲길을 지나고 산등성이의 8부 능선 쯤에 이르자 숲이 끝나고 가는  실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 올라가자 조망이 넓게 펼쳐지는 캐스케이드 패스에 도착하였다. 트레일 헤드로부터 6km 지점이었다. 캐스케이드 패스를 넘어 직진 방향으로 내려가면 캐스케이드 패스 트레일(Cascade Pass Trail)이 계속 이어지고, 저 아래 분지에는 펠튼 베이슨 야영장(Pelton Basin Campground)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수십 편의 유튜브 영상과 수백 장의 구글링 이미지를 보았지만 막상 캐스케이드 패스 위에 섰을 때 동서남북 위치 감각과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분류되고, 꺼내기 좋게 머리 속에 다시 정리되었다. 마치 사방 정신없이 흩어져있던 쇳가루들이 강한 자석에 이끌려 질서정연하게 자석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때서야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봉우리들을 알아볼 수 있었고, 글로만 읽었던 트레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곰이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먹이 활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캐스케이드 패스의 주인은 곰이었다. 우리가 커다란 곰과 마주친 것은 캐스케이드 패스를 넘어 사할리 암 트레일로 접어드는 곳이었다. 캐스케이드 패스로 올라오는 길에 하산 중이던 미국인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연신 Big one~ Big one~이라고 하며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곰이 불과 30여 미터 언덕 위에 버티고 있었다. 큰 덩치와 새끼를 데리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컷으로 보였고, 먹이 활동에만 열중했지 우리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조심스러웠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올라오던 다른 하이커는 곰을 보자 포기하고 다시 내려가버렸다. 곰은 우리의 목적지 캠프로 향하는 언덕 위에 있어서 트레일을 계속 올라가려면 곰과의 거리가 좁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곰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서 올라갔지만 다행히 곰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데면데면하게 구는 곰을 지나쳐 다시 유화 그림같은 가을 풍경의 사할리 암으로 들어섰다.


색채의 향연, 사할리 암

사할리 암(Sahale Arm) 에 올라서자 다웃풀 레이크(Doubtful Lake)가 내려다 보였다. 이런 곳에 호수가 있을까 의심스러운 탓에 ‘의심스러운 호수’라는 이름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할리 글레이셔의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여러 갈래로 모여들어 호수를 이루고 다시 크릭을 만들어 대지를 적시며 흘러내려갔다. 


늦가을 색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사할리 암 구간

사할리 암에서 둘러보는 풍광은 우리의 걸음을 계속해서 붙잡았다. 날카로운 봉우리들 사이의 골짜기마다 저마다 조금씩 조금씩 제 살을 깎아내리며 빙하를 안고 있었고, 곧 겨울이 닥치기 전 풀과 나무들은 찬란한 색채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공간과 색채와 코끝을 간지는 바람에 압도되어 우리는 점차 희미해졌고, 마침내 풍경 속에 스며들어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사할리 피크는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었다. 날카롭게 솟은 사할리 피크 아래에는 넓은 설원이 펼쳐져있고, 그 아래 어디쯤이 캠프였다. 숨이 턱에 닿을 듯 거친 너덜지대를 지나고 엊그제 내린 눈이 습설이 되어버린 설계면을 두발짝에 한발짝은 미끄러지며 건넜다. 지칠 때쯤이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기억은 어차피 희미해지는 것이므로, 나는 바람과 냄새와 풍경을 가슴 속에 깊이깊이 각인했다.


독수리 둥지에 도착하다.

이제 되었다, 그만 배낭을 내려놓고 싶다고 할 때쯤 거대한 독수리가 살았을 거 같은 '둥지'에 도착하였다. 빙하지대의 경계에 요새처럼 만들어진 6개의 텐트 사이트는 세상을 등진 도인의 움막같기도 했다. 독수리는 영역을 경계하러 떠났고, 도인은 세상을 구경하러 내려 간 사이, 하룻밤은 우리들 차지였다. 아래쪽 안부에 바람을 피해 텐트 한동이 보였다. 두명의 백패커였다. 우리는 서로 양팔을 크게 벌려 흔들며 반가움을 나누었다.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 돌무더기가 캠프사이트이다.

쉽게 범접하지 말라는 듯 넓은 빙하를 발 아래 펼쳐놓은 사할리 피크는 그래서 더욱 근엄해보였다. 상어의 아가미 모양으로 발달한 크레바스는 피크를 호위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만 너희들의 세상이다라고 말한다. 날카로운 검은 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뒤로 켜켜히 캐스캐이드의 맹장들이 도열해있다.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면 하루해가 짧을 것이다. 우리는 빈 둥지 한곳을 정해 부지런히 텐트를 설치하였다. 


당신들도 우리가 보이는가...

밤이 깊어가자 멀리 캐스케이스 산맥 위로 호기심 많은 별부터 빛을 밝히며 떠올랐고 검은 산맥 위로 흰 달빛은 처연했다. 먼 우주를 유영하여 지구에까지 도달한 별빛들이 우리들에게 인사를 한다.

"당신들도 우리가 보이는가?" 
험준한 노스 캐스케이드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해발 2,343미터 사할리 글레이셔 캠프.


해가 저물자 바람이 강해졌다. 텐트를 타고 활강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우리는 텐트의 가이라인을 모두 당겨 돌로 단단히 묶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요새에 설치한 텐트 안에 모여든 우리는 알파미와 라면, 삶은 달걀 따위로 저녁 만찬을 즐겼다. 비록 끓는 물을 쏟고, 에어 매트리스가 펑크나서 패치를 하는 작은 소동은 있었지만 소파에 누워 리모콘 놀이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일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새벽, 후드득 후드득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텐트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낭만적이긴 하지만 기온이 낮은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는 얼어붙을 수도 있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텐트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쏟아지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틈에 우리는 누룽지를 끓여 아침 식사를 하였다. 비가 그치기를 좀더 기다려보다가 철수하기로 하였다.


8시 30분. 마침내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우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캠프를 철수하였다. 저 아래는 이미 구름이 걷히고 있는 것을 보아 더 이상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우리는 비에 젖어 미끄러운 너덜지대를 조심스럽게 지나며 고도를 낮추었다. 다우트플 레이크를 감싸고 있는 사할리 암 등성이에 다다르자 비는 완전히 그쳤다. 우리는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았다. 다시 온다 해도 다시 볼 수 없는 풍경들을 제한된 저장 용량이 넘치도록 꾹꾹 눌러 담았다. 배낭을 깔고 앉아 쉬고 있을 때 대훈이 말했다. “이 바람, 이 햇빛, 이 사람들…모든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다웃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너덜지대를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다. 오른쪽 능선이 사할리 암

비에 젖은 수풀과 눅눅한 대기는 색채마저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멀리 검은 산맥은 담묵으로 그려낸 듯했고, 한껏 습기를 머금은 초원도 어제의 찬란한 컬러 대신 파스텔처럼 연하게 톤을 낮추었다. 거기 길 따라 사람들이 걸어간다.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 희미해지고 또 걸어간다.다시 캐스케이드 패스에 도착해서야 꿈인가 생시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답은 명확하지 않았고, 그 중간 어디쯤일 것 같았다. 


우리는 트레일이 끝내자마자 등산화를 벗어던지고 차 안에 남아있던 캔맥주를 하나씩 들이켰다. 트레일은 끝났으나 우리의 영혼은 아직 미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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