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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Feb 18. 2021

콜로라도 트레일을 걷다

아스펜숲과 맑은 크릭, 눈 쌓인 4000m 고산, 모든 게 완벽한 트레일

여기는 대륙분수령 

콜로라도 트레일은 미국 덴버 남서쪽의 워터튼 캐년(Waterton Canyon) 입구에서 두랑고까지 약 782km에 이르는 장거리 트레일이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4,045m이며, 대부분의 트레일은 3,000m 이상의 고지대로 이어진다. 콜로라도 트레일은 1987년 비영리 조직인 콜로라도 트레일 재단[1]과 미국 산림청이 공동으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미대륙의 분수령인 록키 산맥의 일부이기도 하며, CDT(Continetal Divide Trail)와 일부 겹친다.


처음 콜로라도 트레일을 간 것은 2018년 7월이었다. 그해 OR Show를 참관하기 위해 덴버를 방문한 나는 다음해인 2019년 제로그램 클래식의 대상지인 콜로라도 트레일 답사를 다녀왔다. 그동안 OR Show는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에서 열렸으나 유타주 주지사가 공공토지 개발 계획에 서명한 것을 계기로 참가 기업들이 항의 차원에서 솔트레이크 개최를 거부하였고 2018년부터는 덴버에서 열리게 되었다.


나는 언젠가는 제로그램 클래식을 꼭 콜로라도 트레일에서 진행하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그만큼 콜로라도 트레일은 아름답기도 하고 비영리 단체와 산림청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는 모범적인 트레일이라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게다가 덴버에서 약 200km 정도 거리라서 비교적 접근성도 좋은 편이었다. OR Show가 열리는 덴버 컨벤션 센터에서 이틀간의 업체 미팅을 마치고 3일째 되는 날 렌트카를 픽업한 후 답사 예정지로 향하였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에는 대부분의 미국 소도시가 그렇듯 문을 연 가게나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트레일 헤드가 있는 코튼우드 패스(Cottonwood pass)는 산사태로 인해 도로가 폐쇄된 상태였다. 구글링을 통해 열심히 정보를 취합했으나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정보들을 많이 얻었다. 낡은 모텔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부에나 비스타에서 가까운 야영장을 찾아 밤 12시가 되어서야 텐트를 설치할 수 있었다. 

콜로라드 트레일 답사 중 앤 호수가(Lake Ann)에서의 야영


제로그램 클래식이 예정된 트레일의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둘러보고, 중간 지점인 윈필드(Winfield)에서 앤 호수(Lake Ann)까지는 1박2일 일정으로 직접 하이킹을 하면서 트레일의 난이도와 고소증 정도 등을 체크하였다. 솔로 백패킹을 즐겨하는 나로서는 멋진 경험이었으나 막상 2019년의 제로그램 클래식에서는 이 지역이 폭설로 운행이 불가능해서 우회 트레일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답사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답사를 통해 주요 트레일 헤드를 확인하였고, 트레일의 전체적인 개념이 머리 속에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출정 전야제

국내에서 1, 2차 사전 훈련을 마친 2019 제로그램 클래식 참가자들은 부푼 마음으로 6월 16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였다. 덴버에서의 첫 일정은 REI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소부탄가스는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강행군이었다. 덴버까지는 직항이 없어서 20시간 가깝게 걸려서 덴버에 도착했고, 바로 트레일 헤드가 있는 엘버트 크릭 캠프그라운드(Elbert Creek Campground)로 이동하여 콜로라드 트레일에서의 첫날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엘버트 크릭 캠프그라운드의 아침.

2019년 참가자들은 대부분 준족이었고, 두차례의 사전 훈련으로 팀웍도 완벽했으며, 각자 자기 장비를 최적화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본인의 페이스를 조절할 줄 알았다. 장거리 트레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페이스 조절이다. 다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고산병이었다. 트레일에 들어서자마자 해발 3,000m로 고도를 올려야 하고, 대부분 해발 3,500m와 4,000m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트레일이기 때문이다. 답사할 때 하산길에서는 잠깐 뛰어내려왔는데 두통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첫날 야영지로 사전 예약해두었던 엘버트 크릭 캠프그라운드에는 한국인 PCT 하이커들의 트레일 엔젤이자 미국에서 여러 차례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탱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일부 구간을 함께 걷기로 하였다. 우리는 다음날의 일정 때문에 부지런히 저녁 식사를 준비한 후 설레이는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캔 맥주 하나씩으로 조촐한 출정 전야제를 마쳤다.


트레일 헤드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코튼우드 패스는 눈이 녹지 않아서 접근이 어려울 거 같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일단 현지에 도착해서 상황을 점검하고 원안대로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플랜B로 계획을 수정할 것인지 정하기로 하였다. 덴버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원래 걷기로 했던 트레일은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리는 플랜B로 염두에 두었던 컬리지엇 피크 루프(Collegiate Peaks Loop)의 동쪽 트레일(Collegiate East)을 걷기로 했다. 콜로라도 트레일은 부에나 비스타 부근에서 동쪽과 서쪽(Collegiate West)으로 길이 갈라지는데 동쪽과 서쪽을 한바퀴 도는 트레일을 컬리지엇 피크 루프라고 한다. 원래 동쪽은 콜로라드 트레일, 서쪽은 CDT의 일부 구간으로 여겼으나 CDT 하이커들은 트레일의 상태에 따라 동쪽과 서쪽을 선택해서 통과한다. 2018년 답사를 다녀왔던 트레일은 서쪽 트레일(Collegiate West)이었으나 일부 구간이 겹치고, 트레일 헤드도 비슷한 위치에 있어서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콜라라도 트레일과 CDT가 함께 표시되어 있는 이정표 앞에서 일행들이 장난스런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SOBO(Southbound)와 NOBO(Northbound) 두 팀으로 나누어 각각 남쪽 방향과 북쪽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중간에 두 팀이 만나 자동차 키를 바꾸고 각자 트레일 헤드에 세워 둔 차량을 회수하여 출발점이었던 엘버트 크릭 캠프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답사를 다녀온 내가 NOBO팀의 길안내 역할을 하고, SOBO팀은 이미 CDT를 종주하면서 이쪽 트레일을 잘 알고 있는 양희종 이하늘 내외가 길안내 역할을 하기로 했다. 이 둘은 일부러 안내 역할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합류했다. 하이킹 일정은 3박 4일이었으며, 총 거리는 약 72km였다. 혹시 모를 고소 증상을 고려해서 비교적 넉넉하게 하이킹 일정을 잡았다.


6월의 눈 

트레일 곳곳에 녹지 않은 눈 때문에 걸음이 늦어지곤 했지만 그 마저도 즐거움이었다.

다행히 고소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이었다. 6월말의 눈이라니…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걸음을 더디게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했다. 낮기온은 15도에서 20도 사이로 걷기에는 최적의 날씨였으며, 밤에는 0도까지 떨어져서 꽤 쌀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콜로라도 트레일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낙뇌였다. 험준한 록키 산맥에 비구름이 걸려서 오후 2시가 넘으면 낙뢰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리기 일쑤였다. 사전 답사 때에도 낙뇌와 함께 소나기를 만나 한 시간 이상을 대피했었다. 다행히 우리는 운이 좋았다. 쾌적한 날씨에 일정을 조금씩 앞당기면서 걸을 수 있었다. 


트레일에서의 첫째 날 야영지

첫날의 야영지는 해발 3,500m가 조금 넘은 지점이었다. 트레일 헤드의 고도가 약 2,800m였고, 업힐 표고차가 700m 정도라서 그런지 경미한 두통 이외에는 특별히 고소 증상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파이어링 주변에 둘러앉아 모닥불을 피우고 눈을 헤치고 오느라 흠뻑 젖은 신발과 양말을 말리며 저녁을 준비했다. 이날의 운행 거리는 약 20km였다.


감격스러운 하이 파이브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이킹을 시작한 우리는 가끔 불어오는 바람 소리마저 자장가처럼 여기며 곤히 잤다. 각자 가벼운 식단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둘째날의 야영지는 딱히 정한 곳이 없었다. 1일 20km 이상 운행하다가 적당한 캠프 사이트가 나타나면 야영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쪽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 SOBO 팀은 같은 트레일을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빠르면 둘째날 오후쯤이면 길 위에서 만날 수 있을거라 예상했다. 


트레일에서의 감격스러운 조우

계곡을 건너고 능선에 올라서면 엘버트 산 이 보이기 시작했다. 엘버트 산[2]은 온통 흰 눈을 쓰고 있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엘버트 산 아래에 있는 엘버트 크릭 캠프그라운드였다.


4시간쯤 걸었을까.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SOBO 팀이었다. 전체 구간에서 우리가 약 45%를 진행했고 SOBO 팀은 55%  정도를 진행한 지점이었다. 우리도 빠른 속도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SOBO 팀은 더 빠르게 걷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마치 오래 전에 길에서 헤어진 사람들처럼 큰 동작으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전날 아침에 헤어졌을 뿐이었다.


길에서 다시 조우한 13명은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각자 지나온 트레일 정보를 주고 받았다. 허벅지까지 눈에 빠진다, 업힐이 많다, 야영지는 어디가 좋더라…약간은 과장된 무용담을 섞어 유쾌한 점심 시간을 보내고 다시 각자의 길을 나섰다. 


둘째날의 야영지인 트윈 레이크(Twin Lakes). 구름 사이로 엘버트 산이 보인다.

오후에도 우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날의 운행 거리가 30km를 지나고 누적 거리도 50km가 넘어서 어두워질 무렵에 트윈 레이크(Twin lakes)에 도착하였다. 이제 남은 거리는 20km도 채 되지 않았다. 호숫가에는 야영할 곳이 많았고 호수 뒤로 눈을 뒤집어 쓴 엘버트 산이 보이는 멋진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이런 속도라면 3박4일의 일정을 2박3일로 줄일 수 있을 듯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리드빌(Leadville)의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를 떠올렸다.


스테이크가 우리를 달리게 했다. 

트윈 레이크를 끼고 길게 이어진 트레일을 지나고 있다.

리드빌에는 꽤 유명한 스테이크 식당이 있다. 그곳은 CDT 하이커들에게도 인기있는 곳이었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고, 양도 많은 곳이다. 우리의 목표는 이제 일정을 하루 앞당겨 리드빌에서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근사한 저녁을 먹는 것으로 바뀌었다. 


너나 할 거 없이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목표는 명확해졌고, 남은 트레일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였다. 아마도 이 구간을 지날 때 우리들의 평속은 거의 4km였을 것이다. 통신이 가능한 곳에서 SOBO 팀에게도 변경된 일정을 알렸다.  


길이 쉼터이고 식당이었으며 집이었다.

트윈 레이크를 크게 돌아 이어지는 트레일은 다시 숲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피니시 라인을 향해 뛰어가는 마라토너처럼 백양나무잎(aspen tree)이 사르륵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박수 소리 삼아 엘버트 크릭 캠프그라운드로 뛰다시피 걸었다. 흰 눈을 쓴 우람한 엘버트 산은 이 길을 걷는 하이커들에게 항상 푯대가 되어 주었다.


리드빌에서 다시 모인 우리는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화끈거리는 발을 식히기 위해 슬리퍼를 끌며 스테이크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껄렁한 이방인들을 시골 백인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저기 콜라라도 트레일에서 내려온 하이커 트래시쯤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트레일을, 같은 시간에 걸었으나 그것은 각자의 길이었다. 그 길의 기억들은 저마다 다를 것이며,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백번을 걸어도 세상에 같은 길은 없다. 

흰 눈에 덮인 록키 산맥. 저 산맥의 7부 능선 쯤이 콜로라도 트레일이다.



[1] The Colorado Trail Foundation(www.coloradotrail.org). 콜로라드 트레일의 관리하는 비영리 법인으로 개인회원과 기업의 기부 및 산림청의 예산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2] Elbert mount. 높이 4,401m로 로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미국 본토 기준으로는 휘트니 산(4,421m)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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