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projection)와 투사적 동일시
정신과 의사의 묘미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나는 여자인데도, 어떤 날은 환자의 자애로운 돌아가신 아버지가 된다. 또 어떤 날은, 내 엄마 또래 환자에게 다정한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외로운 남자 환자에게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품어주는 연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순간일수록 역전이countertransference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실제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환자가 내 안에 만들어낸 '누군가'를 잠시 담아주는 것이다.
사실 치료는 그 투사를 환자가 스스로 알아차리고, 다시 거둬들일 때 비로소 끝이 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모습을 덧씌운다면, 이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비어 있었던 걸까.
나는 그 결핍을 추론한다. 그리고 그 결핍이 이 사람의 삶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어떤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지를 본다. 이게 내가 느끼는 정신분석의 재미다.
생각해보면, 이건 진료실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맺는 거의 모든 관계는 어느 정도의 투사와 투사적 동일시 위에서 이루어진다. 정신분석에서는 연애는 둘이 아니라 넷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연인의 이미지, 그리고 상대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연인의 이미지. 이 두 개의 환상이 서로에게 덧씌워진 채 관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대에 맞추어 조금씩 연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내가 아닌 나'가 튀어나온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말을 하고, 하지 않던 방식으로 행동하고, 심지어 스스로도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럴 때는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사람의 연극 안에 들어가 있는 걸까.
결핍이 클수록 투사의 강도는 강해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점점 더 강하게 나를 특정한 역할로 끌어당긴다. 구원자, 부모, 연인. 나는 점점 '나'에서 멀어지고, 상대가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되어간다. 그래서 좋은 관계는 어쩌면 이 한 문장으로 설명될 것 같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관계."
투사가 완전히 없는 관계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환상이 벗겨졌을 때 서로 실망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관계. 진짜 관계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내가 기대했던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이 그대로 드러났을 때. 그리고 나 역시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아도 될 때.
혹시 요즘, 관계 속에서 자꾸 '내가 아닌 나'가 튀어나온다면. 그건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이야기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