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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Jun 24. 2019

디즈니의 드림 캐슬을
되찾아준 왕자, 밥 아이거

이노베이터 - 밥 아이거(Robert Iger) 1화

디즈니를 구한 건 밥 아이거의 임파워먼트였다. 2005년 10월이었다. 밥 아이거는 스티브 잡스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홍콩 디즈니랜드 개장식을 보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구가 번쩍 들어오는 느낌이었어요. 퍼레이드를 보다가 지난 10년 동안 만들어진 캐릭터가 전부 픽사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디즈니는 과거 10년 동안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했어요.” 아이거는 잡스와 디즈니의 명운이 걸린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거가 디즈니의 신임 CEO로 내정된 날이었다.


아이거는 필사적이었다. 아이거는 픽사를 인수하지 못하면 디즈니는 끝장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홍콩 디즈니랜드 개장식에서 돌아오자마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사업부를 정밀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완구나 테마파크 같은 부가수익은 커녕 애니메이션 자체의 상영수익조차 볼품이 없었다. 디즈니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의 대명사가 아니었다. 픽사가 새로운 전설이었다. 신임 CEO로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경영진을 교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안이 없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애니메이션이 없으면 디즈니도 사라진다

솔직히 디즈니의 이사회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쁘다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밥 아이거는 사태의 심각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애니메이션이 사라지면 우리 회사도 사라집니다. 애니메이션 한 편은 커다란 파도를 일으켜서 캐릭터, 음악, 테마파크, 비디오게임, 텔레비전, 인터넷의 각 사업 부문으로 잔물결을 흘려보냅니다. 파도를 일으키는 애니메이션이 없으면 우리 회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밥 아이거는 무너져가던 디즈니의 절박한 이사회에서 3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현상 유지, 둘째는 인물 교체, 셋째는 픽사 인수입니다.” 아이거는 덧붙였다. “여러분, 저는 픽사를 인수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사진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픽사 인수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돌파구였다. 그만큼 현실성이 낮은 제안이었다. 이사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디즈니의 CEO 밥 아이거는 그 길로 픽사의 대주주인 스티브 잡스를 만났다.


아이거는 첫마디부터 잡스한테 협상의 칼자루를 쥐어줬다. “디즈니는 망했다. 픽사가 디즈니의 유일한 희망이다.” 아이거는 잡스한테 자신의 협상 권한을 위임해버렸다. 이제 선택은 잡스의 몫이었다. 픽사를 팔지 않겠다고 거절해버릴 수도 있었다. 사실 잡스는 픽사를 매각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잡스가 인수액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아이거의 방식은 전형적인 협상 전략이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저널리스트 월터 아이작슨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밥 아이거를 좋아하게 된 겁니다. 그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지요. 사실 그건 협상을 시작하기에는 정말 어리석은 방법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잡스는 아이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잡스는 아이거한테도 치명적인 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디즈니는 픽사의 지적재산들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토이스토리>의 속편을 제작할 권리도 사실상 디즈니한테 있었다. 실제로 밥 아이거의 전임 CEO 마이클 아이즈너는 <토이스토리2>를 픽사가 아니라 디즈니가 직접 제작하는 음모를 꾸민 적이 있었다. 마이클 아이즈너는 사내에 써클7이라는 비밀회의를 만들었다. <토이스토리>를 픽사한테서 빼앗을 궁리를 하는 모임이었다. 무엇보다 픽사의 캐릭터들에 대한 소유권도 디즈니한테 있었다.


아이거가 만일 공격 카드를 꺼내 들었다면 잡스 역시 결코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뿐이었다. 실제로 잡스와 사이가 나빴던 아이즈너는 마지막까지도 디즈니와 픽사의 빅딜을 막고 싶어 했다. 이번 빅딜로 잡스가 디즈니의 최대주주가 되는 것만큼은 막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디즈니가 이미 픽사 콘텐츠 수익의 85%를 확보한 상태라는 사실을 이사회한테 설명했다.


그건 밥 아이거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아이거 역시 디즈니가 픽사의 과거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시에 픽사가 디즈니의 미래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이거는 봤고 아이즈너는 외면했던 비즈니스적 통찰이었다. 그래서 아이거는 상대의 급소를 공격해서 무릎을 꿇리는 대신 자신의 약점을 내보여서 대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디즈니 인수합병, 마법의 서막이 오르다

천하의 잡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잡스도 이미 서로 얽히고 설킨 디즈니와 픽사가 차라리 한 몸이 되는 게 더 미래지향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2006년 1월 24일 밥 아이거와 스티브 잡스는 디즈니가 픽사를 74억 달러에 인수하는 빅딜을 발표했다. 아이거 시대의 개막이었다. 2009년 마블과 2012년 루카스필름과 2019년 20세기 폭스 인수까지 이어져온 디즈니 인수합병 마법의 서막이었다. 21세기 디즈니 제국의 시작이었다. 모든 건 스티브 잡스를 설득해낸 밥 아이거의 임파워먼트에서 비롯됐다.


“저 역시 커리어 내내 수없이 많은 입수합병을 경험했습니다. 인수를 하는 편이었던 적도 있지만 인수를 당하는 편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업 조직과 임직원 개개인한테 이번 인수합병이 개인적으로든 직업적으로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2019년 3월 19일이었다. 디즈니의 폭스 인수 작업이 마무리됐다. 디즈니가 20세기 폭스를 524억 달러에 인수한다는 계획이 처음 발표된 건 2017년 12월 14일이었다. 세기의 빅딜이 마무리되는 데까진 1년이 훨씬 더 걸렸다. 폭스의 부채까지 디즈니가 인수하기로 하면서 최종인수금액은 710억 달러까지 불어났다.


3월 19일 당일에 디즈니의 CEO 밥 아이거는 직원들에게 내부 메모를 전달했다. “21세기 폭스가 월트 디즈니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표합니다”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밥 아이거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기의 빅딜을 성사시킨 경영자가 으레 하는 자화자찬 승전보처럼 보였을 수 있다. 사실 메모의 이모저모엔 아이거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발언들로 가득했다.


아이거는 말했다. “양측의 경영진은 서로의 잠재력에 걸린 자물쇠를 열고 혁신과 창의성에 매인 고삐를 풀어서 장기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것입니다. 디즈니와 폭스의 경영진은 이미 함께 중요한 결정들을 많이 내렸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솔직히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모든 질문에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의 조직 통합 능력은 지금보다 훨씬 진화할 겁니다.” 그리곤 말미에 자신 역시 인수된 기업의 임직원이었던 적이 있었단 사실을 상기시켰다. 참 아이거스러운 마무리였다.


밥 아이거는 철저한 비주류였다

밥 아이거가 평소에 자주 하는 자폭개그가 있다.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제목은 ‘나는 팔렸었다’가 될 것.” 밥 아이거는 이타카 대학에서 과학사를 공부했다. 이타카 대학은 코넬 대학으로 유명한 뉴욕 이타카의 시티 컬리지다. 아이거는 적어도 전형적인 아이비리그 출신은 아니란 말이다. 뉴스 앵커가 꿈이었지만 방송 경력은 지방 방송국의 기상캐스터로 시작했다. 어찌어찌 전국 방송국인 ABC로 흘러들어 갔지만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방송인에서 방송경영인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전환한 건 그래서였을 수 있다. 아이거 스스로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보다 카메라 뒤에 서는 게 더 적성에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1985년 캐피털시티가 ABC를 인수한 건 아이거한텐 경력의 전환점이 됐다. 밥 아이거한텐 비주류 인재들 특유의 전략적 유연함이 있었다. 주류 인재는 분명 재능이 있지만 서로가 부지불식 중에 서로의 특권 의식을 강화시켜주기 쉽다. 개인이기보단 무리를 이루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을 띄기 십상이다. 반면에 비주류 인재는 개인으로서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 더 개방적이 되고 더 유연해지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다수인 주류한테 늘 좋은 협업의 대상으로 비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거가 입사한 지 10년 만에 ABC가 통째로 캐피털시티에 인수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젠 ABC도 비주류였다. 캐피털시티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밥 아이거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1989년 ABC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된다. 1996년 디즈니가 다시 캐피털시티를 인수한다. 아이거의 전임자인 마이클 아이즈너 전 디즈니 CEO가 추진한 최대 M&A 가운데 하나다. 아이거는 정말 그렇게 팔리고 또 팔려서 디즈니라는 회사의 일원이 됐다. “나는 평생 팔려 다녔다”는 아이거의 농담이 정말 빈말은 아니었다.


아이거는 디즈니에서도 철저한 비주류였다. 아이거가 디즈니에 합류한 시기는 마이클 아이즈너의 철권 통치기였다. 마이클 아이즈너는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한이었다.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였다. 잭 웰치의 시대였던 1990년대 미국 비즈니스 업계에선 흔한 유형이었다. 마이클 아이즈너는 아이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일단 아이즈너 본인이 ABC 출신이었다. 1970년대 시청률 최하위였던 ABC를 1위 방송국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아이즈너의 밀어붙이기식 경영 방식이 통한 경우였고 통하던 시대였다.


마이클 아이즈너는 1989년 <인어공주>와 1994년 <라이언킹>이 성공을 거두면서 사실상 디즈니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었다. 실제로 디즈니 직원들은 아이즈너를 폐하라고 불렀다. 정작 ABC를 소유한 캐피털시티 인수는 디즈니와 아이즈너한텐 골칫거리가 돼가고 있었다. 1990년대는 케이블 네트워크의 시대였다. ABC 같은 지상파 네트워크는 달라진 시장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아이즈너한테 아이거는 적자의 책임을 물어 자기 대신 희생시킬 방패막이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밥 아이거는 독불장군 마이클 아이즈너 아래에서 10년을 견뎌야만 했다. 밥 아이거는 1999년 디즈니 인터내셔널의 CEO로 선임됐다. 2000년엔 디즈니의 COO로 선임됐다. 사실상 디즈니의 2인자가 됐다. 그때마다 아이즈너는 중책을 맡기면서도 아이거가 카리스마가 약하다고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사실 아이즈너한텐 유능한 오른팔이 있었다. 프랭스 웰스였다. <인어공주>와 <라이언킹>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부활시킨 장본인도 사실 프랭스 웰스였다. 프랭스 웰스는 1994년에 헬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때부터 아이즈너 체제는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이클 아이즈너는 상처 받은 사자처럼 사실상 업계의 거의 모두와 싸웠다. 아이즈너한테 비즈니스는 이기고 지는 올오어낫씽의 세계였다. 아이즈너가 <라이언킹>을 함께 만든 제프리 카첸버그와도 죽기살기로 싸웠다. 결과 드림웍스라는 디즈니의 라이벌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드림웍스는 디즈니를 거의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간다.


디즈니의 드림 캐슬을 되찾아줄 백마 탄 왕자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황제 아이즈너의 전횡은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아이즈너는 월트 디즈니의 조카이자 창업주 가문의 수장인 로이 디즈니와도 갈등을 빚었다. 로이 디즈니의 디즈니 지분은 1%도 채 되지 않았다. 상징성만큼은 엄청났다. 심지어 1985년 마이클 아이즈너를 디즈니 CEO로 발탁한 장본인이 로이 디즈니였다. 아이즈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로이 디즈니를 이사회에서 내쫓아버렸다.


2003년 12월 로이 디즈니는 디즈니를 떠나면서 마이클 아이즈너의 퇴임을 공개 요구했다. 2004년부턴 세이브 디즈니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이즈너가 시비를 걸었던 또 다른 상대는 바로 스티브 잡스였다. 아이즈너는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잡스와 애플을 공개 비판했다. “컴퓨터를 사면 도둑질로 CD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광고하는 회사가 있어요.” 백해무익한 발언이었다. 디즈니와 픽사의 투자배급계약을 경신할 시점이었다. 상도의에도 어긋나는 공격이었다. 이 말 한마디가 잡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스티브 잡스는 아이즈너를 대신할 인물로 첫 만남부터 내심 밥 아이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로이 디즈니는 디즈니를 떠나면서 스티브 잡스에게 이런 메모를 남겼다. “사악한 마녀가 죽으면 우린 다시 뭉칠 수 있을 겁니다.”


사악한 마녀 아이즈너로부터 디즈니의 드림 캐슬을 되찾아줄 백마 탄 왕자가 바로 밥 아이거였다. 경영자로서 아이거한테는 있고 아이즈너한텐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 디즈니한테 가장 필요한 경영 요소였다. 바로 자신의 권한을 임직원들한테 기꺼이 위임하고 비즈니스 파트너를 확실히 신뢰하는 임파워먼트의 기질이었다.




앞으로 <이노베이터> 매거진에는 매주 월, 화요일에 혁신경영인과 혁신기업에 관한 인사이트를 연재합니다. 다음화도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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