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죽음을 대하는 자세
우리말 속에 섞여있는 한자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이고 다듬어진 생각의 구조이자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단어의 뿌리를 이해하는 순간, 사고는 정제되고 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위로의 말은 대개 이렇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여기서 ‘삼가’는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라는 의미의 고유어이고, ‘명복(冥福)’은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명(冥)의 훈은 ‘어둡다’인데, 결국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 속에는 염라대왕의 심판을 잘 받아 극락으로 가길 바라는 도교와 불교의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명복을 빈다는 말 대신에 종종 “영면을 기원합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정치인의 현수막 문구를 둘러싸고 ‘영면’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영면을 기원합니다”라는 표현, 정말 문제가 없을까요?
영면(永眠)을 구성하는 한자는 ‘길 영(永)’에 ‘잠잘 면(眠)’입니다. 말 그대로 ‘영원히 잠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망(死亡)과 같이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잠에 비유해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지요.
국어 규범을 살펴보면, 영면은 기본적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고인이 영면에 드셨습니다”와 같이 제한적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영면을 기원한다고 하면, 그저 ‘영원히 잠들기를’, 결국 ‘죽기를 바란다’는 어처구니없는 뜻이 되고 맙니다. 설사 의도적으로 그런 의미를 담을 리 없겠지만, 무심코 사용한다면 고인과 유족에게 커다란 결례가 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온라인가나다’에서도 ‘영면’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편안한 영면을 기원합니다’,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처럼 수식어를 넣어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사망과 영면 외에도 우리는 죽음을 이를 때 여러 가지 상징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단어가 달라지면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집니다. 서거(逝去)는 ‘갈 서(逝)’와 ‘갈 거(去)’로 이루어진 한자어로, 이승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이동으로 바라보는 표현입니다. 별세(別世)는 세상[世]과 헤어진다[別]는 뜻으로 무엇보다 헤어짐의 의미가 강조됩니다. 작고(作故)는 ‘지을 작(作)’과 ‘옛 고(故)’, 글자 그대로 ‘옛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현재에서 물러나 과거의 사람이 되는 시간적 이동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열반(涅槃)은 ‘진흙에 물들다, 잠기다’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말이지요. 천주교의 선종(善終)은 ‘삶을 잘[善] 마쳤다[終]’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보다도 생의 마무리에 초점이 있습니다. 개신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소천(召)은 ‘하늘[天]의 부름[召]을 받아 떠난다’는 뜻으로, 현실을 초월하는 종교적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두고 아주 조심스레 말을 고르고 가려 쓰는 건, 우리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죽음을 대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