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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07. 2019

공감력은 능력이 아닌 태도다

10여 년 전쯤,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지인께서 푸념하시길, 강사라는 직업상 책을 많이 봐야 하는데, 눈이 침침하고 피곤하여 오래 책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나는 40대 초반이었고 시력은 1.5, 1.2. 평생 잘 안 보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지 모르고 살아왔기에 그 지인의 한탄이 한낱 책을 안 읽기 위한 핑계로만 들렸다.


십여 년이 흘러 내가 당시 그분의 나이가 되었다. 어느 날 엄마를 모시고 극장엘 갔는데, 좌석표의 번호가 보이지 않아 당황하여 엄마한테 봐 달라고 했더니 엄마는 더 안 보인다며 깔깔 웃었다.


요즘은 매일 두 눈이 충혈되어 있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피곤해 보인다고 하질 않나, 저녁만 되면 눈꺼풀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어 맥주 한 잔을 마시려고 앉아 있는 일도 힘에 부친다. 깜박 잊고 돋보기를 챙겨가지 않은 날은 뭔가를 읽기에 공치는 날이다. 여전히 지하철 객차 내에서 지갑에 끼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명함 크기만한 돋보기를 판매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예전엔 그런 돋보기를 과연 누가 살까라고 심각하게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시력은 딱히 나빠지지 않았으나 노안이라서 별 방법이 없단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은 '건조한 눈엔 인공눈물액을, 피곤한 눈엔 휴식을' 이었다.


아! 이런 눈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다니 걱정이다. 당시 그분의 한탄을 핑계라고 치부해버린 것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걸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에게 닥친 '노안'이란 내가 경험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흔히 미래에 중요시될 역량 중 하나로 '공감능력'을 꼽는다. 공감이란 상대의 감정이나 의견에 대해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AI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공감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글과 사진에 '좋아요'와 하트를 누른다.


공감할 줄 알고, 공감 가는 콘텐츠를 생산할 줄 아는 것이 미래에 필요한 역량임은 이젠 기본 중에 기본이 되어버린 지식이다. 그런데 공감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학습이나 연습으로 취득할 수 있는 역량일까? 내가 노안이 되어보기 전엔 돋보기가 왜 필요한지, 책을 읽는데 눈의 피로가 어떤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노안에 관련해서는 어떤 공감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남자는 여자가 되어보지 않고, 여자는 남자가 되어보지 않고 그들이 느끼는 사회적인 불평등이나 그 성이 겪는 특별한 문제점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젊은 사람은 늙어보지 않고서는 노년층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 먹은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본 젊은 층의 다양한 문제를 이해할까? 그것도 그렇지 않다. 지금의 노년층이 젊었을 때 겪었던 문제와 이 시대의 청춘이 겪는 문제는 사회 문화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 상사와 부하 등 공감이 필요한 모든 관계는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는 맹점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다. 결코 같은 시기에 상반된 자리에 있는 두 역할을 동시에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감할 수 없으니 서로의 입장과 주장만을 내세우라는 말을 하려느냐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추론할 수 있다. 책이나 매체, 타인의 경험담, 내적인 통찰 등을 통해 가상의 공감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반복적인 피드백을 통해 높은 수준의 공감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 이라기보다는 공감을 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그런면에서 공감력이란 ability가 아니라 attitude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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