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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19. 2019

시인의 사전

<필사 노트>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나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사랑하지 못하는 건가 보다

누군가의 시를 듣는다는 것은 마음을 가만히 펼쳐놓고 바라봐주어야 하는 일이거늘

누군가의 시를 외운다는 것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고개 끄덕여야 하는 일이거늘

누군가 자신의 시를 잊었을 때 그 시를 다시 들려준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서려는 나를 버려야 가능한 일이거늘...

오늘 밤 나의 주제는 '사랑하지 못하는 나'로



<필사 노트>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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