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정 Jun 10. 2020

저, 남편 없어요.

1일 1글 시즌4  [ episode 73]

오랜만에 저녁 모임을 하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다시 모여 2차를 갔다. 술보다 말이 많은 시간. 우리 모두 집에 가기 싫다를 외치며 해도 해도 끝나지 않던 이야기는 '내일 출근'에 대한 현타가 오며 급속 현실 자각의 자세로 엉거주츰 일어나며 막을 내렸다.  9시 30분에 시작된 모임이 끝난 시간은 새벽 2시. 차를 가져온 사람들은 대리기사를 부르고 나는 택시를 타기 위해 큰길로 나갔다.


빈 차가 많다. 집 가는 방향의 차를 잡아야 하니 횡단보도를 건넌다. 사거리 신호대기에 걸린 '빈차'사인의 택시들이 줄을 서있다. 잠시 후 빈차가 내 앞에 도착하고 나는 상냥하게 인사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술을 별로 마시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술 취한 티가 날까 조금은 두려운 마음에 또박또박 목적지를 말했다. 잠시 후 기사 아저씨가 묻는다. 


"퇴근하시는 거예요?" 


새벽 2신데 뭔 퇴근? 택시 타면 말 시키는 기사님 쫌 별론데... 왠지 좀 수다스러운 분이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에요. 이 시간에 뭔 퇴근요. 모임이 있었는데 끝나는 시간이 좀 늦어졌네요... 호호호"


그러자 대뜸 하시는 말씀 


"이 시간에 들어가면 남편한테 안 쫓겨나요?"


휴... 배 안쪽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온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혹시라도 '욱'스타일의 대답이 될까 싶어 그냥 쿨하게 말했다.


"저도 남편이 2시에 들어온다고 내쫓진 않거든요..."


이 정도면 대충 맥락은 알아들으시겠지 생각했는데


"남편은 일하다가 들어오는 거잖아요..."


아! 이래서 나한테 퇴근하는 거냐고 물어본 거였어? 이런.... 씨....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아이코! 제가 지금 세상을 이해 못하고 꼰대 발언을 했네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하며 깊은 반성을 하게 만들 수 있지? 아니 어떻게 해야 '아이코 이런 중요한 분을 몰라 뵙고 제가 경거망동했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게 할 수 있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유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그 기사님이 가진 대한민국 여성에 대한 편견은 깨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불현듯 아침에 보았던 인터넷 기사 중 최근 56년 만의 미투 사건이 떠올랐다. 올해 74세 되신 여성은 18세 때 괴한의 성폭행에 반항하다가 괴한의 혀를 깨물어 1.5 cm 정도 절단시켰다. 이 일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개월을 선고받았다. 괴한은 강간미수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판결이란 말인가? 더 기가 찬 것은 재판 과정 중 '가해자랑 결혼하면 간단하다' 거나 '여자가 남자를 불구를 만들었다'는 등 의 비아냥거림이 있었다는 것,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검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 주변엔 훌륭한 분들이 많다. 훌륭함이란 남녀의 차이는 인정하고 차별은 금기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는 남녀 모두에 해당한다. 당연히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차별은 없애야 한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성인지가 몇 년도 버전인지 확인해야 한다. 끊임없이 스마트폰은 업데이트하면서 내 사고, 내 관념, 내 인지는 10년 전, 20년 전 버전인 상태로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새벽 2시에 들어가서 남편한테 쫓겨났으면 백만 번도 더 쫓겨났을 것이며, 내가 쫓겨났다면 나 또한 남편을 쫓아냈을 거다.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린가 말이다. 한참을 흥분하다가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간단하게 대화를 원천 차단하는 대답을 생각해냈다. 


"저 남편 없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불쾌함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순간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