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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01. 2018

그를 기억한다는 것

프레데리크 바지유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걸려있는 오르세 미술관의 2층 메인 전시실은 항상 관람객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오르세의 핫 스폿이다. 그 전시실에는 마네의 그림을 보고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그림이 있다. <콩다민 가의 바지유 아틀리에>


그 그림 앞에서 한 참을 서있던 나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동시에 기분 좋은 울렁거림을 느꼈는데 그것은 아마 경외심과 부러움의 중간 정도 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층고가 높고 넓은 공간, 햇살이 잘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뒤로 보이는 파리 풍경, 이젤 앞에선 세 명의 남자, 그리고 또 다른 세 남자. 그저 반복되는 듯한 일상의 풍경을 꾸밈없이 그려낸 작품. 그림의 정보를 찾기 위해 작가의 서명으로 눈을 돌려 보면 F.Bazille. 1870. 읽어보려 하지만 '바...'하고 소리 내다 불어인가? 하며 읽기를 멈추게 되는 이 화가의 그림이 왜 내겐 그리 감동적이었을까?


Frédéric Bazille! 한국어로 표기하면 프레데리끄 바지유 정도 될 텐데, 그는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시슬리 등과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지만 인상파 화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다. 1841년 프랑스 몽펠리아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공부를 하던 바지유는 공부를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파리로 와서 학업과 그림을 병행했다. 그러나 의사시험에 낙방한 후 학업을 그만두고 그림에만 전념한다.


'아들에게 의학공부를 시키는 부유한 부모'하면 우리 머릿속에 자동 생산되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지만 바지유의 부모님은 그가 의학공부를 그만두었음에도 아들을 지속적으로 지지했던 모양이다. 파리에서 생활하던 바지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여전히 부모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 집엔 지금 클레르 화실 시절 같이 배웠던 한 친구가 숙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화실이 없는 친구죠.

이름이 르누아르인데, 그 친구는 대단히 열심히 작업합니다.

내 모델들을 같이 쓰고 있는데, 그 비용에 보태라며 뭘 내놓기까지 한답니다." (1867년 바지유가 부친에게 쓴 편지)



왼쪽: 르누아르가 그린 바지유     오른쪽: 바지유가 그린 르누아르



파리의 콩다민 거리 9번지,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당시 아카데미적인 살롱 화풍에 반발하는 그 당시의 "요즘 것들"이 모여 새로운 회화에 대해 고민하고 공감하던 공간이었다. 가난해서 작업실을 임대할 수 없었던 르누아르가 바지유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어찌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르누아르를 탄생시킨 공간이 바로 바지유의 아틀리에일지도 모른다. 부유했던 바지유는 아직 제대로 돈벌이를 못하고 있는 친구들(모네, 르누아르)의 그림을 사주고, 그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콩다민가의 바지유 아틀리에>의 중앙에 서있는 키 큰 남자가 바지유다. 그 앞에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사람은 당시 그들의 멘토 역할을 했던 마네, 그 옆에 가슴께 손을 올리고 있는 남자는 조각가 겸 예술비평가 자샤리 아스트뤽이거나 혹은 모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 둘은 르누아르나 시슬리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바지유는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제 아틀리에를 그렸는데, 그림 속의 제 모습은 마네가 그려주었습니다."


라고 적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측에서도 그림 속 바지유를 그린 붓의 터치는 마네의 것이 맞다고 확인한 바 있다. 바지유의 화실의 벽면엔 그가 친구들을 위해 사 주었던 그림들이 보인다.

그림의 오른쪽 벽면에 르누아르의 <서 있는 나체 여인>과 그 아래 모네의 <과일 정물화>가 있다.

<서 있는 나체 여인>은 르누아르가 출품했지만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이다. 아마도 르누아르를 위로하고 그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바지유가 구입해 주었을 것이다. 그 아래 작은 정물화는 모네의 그림인데 이 또한 물감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황에 자주 쳐했던 모네를 돕기 위해 사들인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 바지유와 르누아르는 29살 동갑내기, 모네는 한 살 많은 서른 살. 이 셋은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미술계를 혁신할 꿈을 꾸었다.


모네가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어.

내 그림에 들어갈 인물들 뒤의 배경을 선정하려고 하는데 너의 조언이 필요해.

네가 내 작업을 도와준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거든,

네가 그림 속 인물들의 포즈를 잡아주지 않으면 내 그림은 실패할지도 몰라."


                                              

왼쪽: <자화상> 프레데릭 바지유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29살의 바지유는 국민방위군에 자원한다. 그리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가 그린 <콩다민가의 바지유 아틀리에>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바지유가 꽃다운 나이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르누아르나 모네와 같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화가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베푼 선한 우정은 르누아르나 모네가 기존의 아카데믹한 화풍에 반발하여 시대에 혁신을 일으키는데 분명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거라는 것이다.


한 때 개그 프로그램의 대사로 유행어가 된 말이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우리가 기억하는 1등의 화가들, 그들을 있게 한 수없이 많은 바지유들. 그들이 없었어도 지금 우리를 감동케 하는 예술작품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림 그릴 공간이 없던 수 많은 르누아르들, 물감 살 돈이 없었던 수많은 모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대를 관통해 지금껏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명작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수많은 바지유를 기억해야 한다.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거두고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는 1등을 만들어 준 그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다시 또 그 기분 좋은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빨리-많이-대충 에서 천천히-깊게-대화하는 여행을 만들어주는... 그림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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