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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23. 2020

역사적 사실로 그림 감상하기

1일 1글 시즌4 [episode 87]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영국의 브랜드가 뭘까요? 의류 브랜드인 버버리? 고급 승용차의 대명사 롤스로이스? 그 보다 더 유명한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영국 왕실입니다. 브랜드 가치를 평가하는 컨설팅 업체 '브랜드 파이낸스'는 영국 왕실의 브랜드 가치를 한화 98조원으로 추정했습니다(2017년). 이는 왕실이 보유한 유형자산과 정량화할 수 없는 브랜드의 영향력을 모두 고려해 추산한 결과라고 합니다. 이중 부동산이나 예술작품 등 유형 자산은 36조원 정도라고 하니 왕실의 가치는 유형 자산 이외의 것에서 더 창출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2018년 해리 왕자와 미국 배우 메건 마클의 결혼식은 10억 파운드, 약 1조 4.965억 원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고 합니다. 영국 왕실을 향한 세계적인 관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그 왕세손부부가 얼마 전 영국 왕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직계가 왕실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 아버지 에드워드 8세 또한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무거운 책임을 맡는 일도, 왕으로서 원하는 바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일도,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이혼녀였던 심슨 부인과의 사랑을 선택하며 왕실을 떠나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덕분에 소심한 성격에 말 더듬증까지 있던 조지 6세가 왕이 됩니다. 조지 6세의 이야기는 콜린 퍼스 주연의 ‘킹스 스피치’로 영화화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영국 왕실에 관한한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죠.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유럽인 이야기’에서 헨리 8세는 “근대 영국을 출범시킨 호색한”이란 제목으로 소개됩니다. 우리가 칵테일 이름으로도 알고 있는 ‘블러디 메리’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아내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영국의 첫 번째 여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여왕이 되기까지 수많은 질곡을 겪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엄마인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 때문입니다. 앤 불린이 누구입니까? 뛰어난 외모와 도발적인 매너로 헨리 8세를 로마 가톨릭의 교황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루게 한 장본인이자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사람이죠. 그러나 우리가 ‘천일의 앤’이라고 부르듯 왕비가 된지 2년 9개월 만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죄목은 간통과 근친상간이었는데 실질적인 이유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앤의 하나뿐인 딸이 후에 튜더 왕조의 걸출한 군주, 엘리자베스 1세가 됩니다. 아무튼 헨리 8세는 앤 불린 이후로도 네 번의 결혼을 더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역사 중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이 바로 헨리 8세가 통치했던 튜더 왕조 시기인 이유는 이런 막장드라마 같은 스토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문득 헨리 8세와 앤 불린을 비롯한 당시 인물들의 모습이 궁금해졌습니다. 헨리 8세 재임시절 궁정화가는 한스 홀바인 이었는데 그는 서양 미술사에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 중 한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찾아보면 이름 뒤에 younger 혹은 한자 소(小)가 붙어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한스 홀바인의 아버지이름도 한스 홀바인이었고 직업도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한스 홀바인과 구분하기 위해 younger를 뒤에 붙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청출어람이었던 아들 때문인지 아버지 한스 홀바인의 작품이 그리 많지 않아 한스 홀바인 하면 대부분 아들을 의미합니다. 한스 홀바인은 초상화의 덕목인 닮게 그리는 기술은 물론 대상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그린 헨리 8세의 초상은 왕의 상징하는 소품을 그려넣지 않고도 표정과 자세만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런 탓에 그가 그린 앤 불린의 초상화를 보고 싶었지만 작자 미상의 초상화 몇 점만이 남아있더군요. 다행인지 앤 불린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스 홀바인의 스케치가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앤 불린이 처형되고 헨리 8세이 세 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가 드디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나 산후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헨리 8세는 네 번째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한스 홀바인을 유럽 각지에 보내 왕비가 될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합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이자 재상이었던 토마스 크롬웰은 오늘날 독일의 라인라트 지방의 작은 공화국인 클레브의 앤을 왕비로 천거하였고 한스 홀바인은 클레브로 가서 앤의 모습을 그려옵니다. 홀바인이 그려온 20살의 앤의 모습을 본 헨리 8세는 무척 만족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기대에 부푼 헨리 8세는 정작 결혼식 날 앤의 얼굴을 보고서는 무척이나 실망했고, 결국은 파혼하고 맙니다. 이 결혼을 추진했던 토머스 크롬웰은 반역죄로 재판도 없이 참수당하고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한스 홀바인도 하루하루 좌불안석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3년이 지나 홀바인이 사망하는데 당시 런던을 강타한 페스트 때문이었습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런던 내셔날갤러리 1-3번 방은 튜더 왕조 인물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대사들>을 위시하여 앤 불린의 초상, 앤 불린의 딸이자 훗날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1세의 초상, 그리고 첫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의 초상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의 초상화도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유일하게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6명의 왕비의 운명에 대해 영국 본토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답니다.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아! 그 운명의 소용돌이를 피해간 여성의 초상이 하나 더 있는데요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의 초상입니다. 네 번째 왕비를 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간 한스 홀바인이 덴마크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헨리 8세는 청혼을 했지만 크리스티나가 단칼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튜더 왕조의 그림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볼까요? 뉴욕 맨하탄 5번가의 뮤지엄 마일에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의 저택이 있습니다. 석탄 사업으로 큰 부호가 된 그는 많은 예술품을 수집해 자신의 집에 전시해두었는데 1919년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1935년에 공공미술관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이곳에 한스 홀바인의 작품 <토마스 모어의 초상>과 <토마스 크롬웰의 초상>이 있습니다. Living hall 관람실의 벽난로 바로 위에는 매너리즘의 거장 엘 그레코의 작품이 걸려있고 그 작품의 왼쪽엔 <토마스 모어의 초상>이 오른쪽엔 <토마스 크롬웰의 초상>이 걸려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이 나란히, 그것도 서로를 마주보고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헨리 8세 시대의 법률가이자 정치가이며 우리에게 <유토피아>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토머스 모어는 토머스 크롬웰의 정치적 숙적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이혼을 반대하다가 크롬웰의 주도로 반역죄를 선고받아 참수 당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크롬웰 또한 헨리 8세의 네 번째 왕비를 천거하는 과정에서 한스 홀바인이 너무 아름답게 그려온 클레베의 앤의 초상화 때문에 반역죄로 참수 당하게 되었죠. 한스 홀바인이 그린 두 사람은 모두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그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시간이 흘러 자신들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명성과 더불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의 저택에 서로를 마주 본채 영원히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프릭컬렉션 Living hall에 전시된 <토마스 모어의 초상>과 <토마스 크롬웰의 초상> 프릭컬렉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실제 공간에서 보듯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림엔 관심이 적어도 역사나 정치사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런 사실에 기반하여 그림 감상을 시작하는 것도 흥미로운 접근법이 될 수 있습니다. 19세이 후반 카메라가 발명되며 역사의 기록은 사진이 맡아서 하고 있지만 그 이전엔 그림이라는 매체가 그 역할을 대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은 시대적인 요소를 읽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인지적인 감상에 시각적 감상을 더한다면 그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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