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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28. 2020

깊고 느리게 읽기

1일 1글 시즌 4 [episode 92] 필사노트 '호모부커스-이권우'

10년 전쯤에는 책을 한 권 사서 창 넓은 커피숍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커피와 간단한 요기를 하며 책 한권을 읽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책 한 권을 진득하게 읽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일에 관련된 실용서적들 여러권을 겹쳐서 펼쳐놓고 추르륵 페이지를 넘겨보다가 필요한 부분만 골라 정독하고 나면 에버노트에 옮겨놓은 글들이 나의 생각이었는지 책을 필사한건지 모를 상황이 생기곤 한다. 책장 한 구석에는 '말테의 수기'와 '인생의 발견', '행복의 정복'이 이럴거면 날 왜 사온거야라며 눈을 흘리고 있다. 당장 만들어야 할 보고서와 이번 주 까지 보내기로 한 제안서와, 이번 달 마감하기로 한 원고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며 '내가 먼저'를 외치고 있으니 이,삼십분 간격으로 나는 파일을 바꿔가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지만 정작 나오는 결과물이 없다. 


아! 주자의 말처럼 '깊고 느리게 읽기'가 가능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조급증 없이, 노안의 불편함 없이, 쨍한 총기가 있었던 젊은 날의 책읽기가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날이라... 2008년 읽었던 책을 꺼내 몇 페이지를 필사해본다.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주자가 살아 있을 적에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인 <주자어류>에 '독서편'이 있는데, 제목대로 책읽기와 관련된 내용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서점에 나갔더니 <주자어류> 번역본이 몇 권 있는데 양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부터 꺼내 검토해 볼까 하다가, 그 책들 옆에서 <주자서당은 어떻게 글을 배웠나>(청계, 1999)라는 책을 보았다. '송주복 지금'이라 되어 있어 지은이가 주자서당에서 학습하는 모습을 복원했나 싶어 망설이다 서가에서 꺼내 표지를 살펴보았더니, 한구석에 '주자어류-독서법 역주와 해설'이라 되어 있었다. 판권에는 "이 글은 <주자어류> 권10 '독서법 상'과 권11 '독서법 하'를 온전히 번역하고 해설한 것이다."라고 밝혀 놓았다. 순간, 이거 횡재했군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주자어류>를 다 안 읽어도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도둑놈 심보가 발동했던 것이다. 


주자는 제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책읽기를 가르쳤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소감을 먼저 말하자면, 일견 새로울 게 없었으나 곱 씹어 보니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값진 잠언들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주자가 누구던가.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그의 이름을 빼고서는 동북아 철학사를 쓸 수 없는 대학자 아니던가. 비록 어록을 모아놓아 체계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있으나, 그런 만큼 현학적이지 않고 자상하면서도 깊이 있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책에 제일 먼저 나온 구절은 "독서는 배우는 사람의 두번째 일이다". 맨 앞에 너무 도전적인 글이 씌어 있어 당혹스러울 터. 상식으로 보건대, 옛사람들에게는 독서가 배우는 사람의 첫번째 일일법한데, 왜 두번째라고 했을까. "일반적으로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는 도리는 선천적으로 완전하게 구비된 것이지만, 독서 해야 하는 까닭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아직 충분히 도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인은 많은 것을 경험을 통해 이해하였고, 그래서 그 이해한 것을 책에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이란다. 도리는 이미 주어진 것인데, 아직 그 실체를 우리가 모르므로 책ㅇㄹ 읽어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는 단지 충분한 도리를 이해하려는 행위이다. 이해하고 나면, 결국 그 이해한 모든 도리들은 자신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지, 자기의 외부로부터 굴러 들어와 첨가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앞 대목의 고비만 넘기면 다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 밑줄 긋기 바쁜데, 때로는 죽비를 읽는 이의 무뎌진 감수성을 모질게 두드리는 구절도 만나게 된다. "글을 볼 때는 모름지기......마치 칼이 등 뒤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구절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때로는 의무감으로, 때로는 권태감에 사로잡혀 억지로 책을 읽었던 경험이 있던 나한테는 정말 정신이 퍼뜩 드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구절은 너무 많아 일일이 소개하지 못할 정도인데, 글을 읽을 때는 "맹장이 병사를 운용할 때 단 한 번의 진으로 온 힘을 다해 끝까지 싸우는 것처럼", "인정 없는 가혹한 형리가 형을 다스릴 때(범죄사실을) 끝까지 추궁하여 결코 범죄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단다.


살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왕왕 있다. 주자의 글에서도 그런 점을 느낄 수 있다. 그때의 사람들이 "열 번을 읽어 보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고 말한다"는 구절이나, "서책을 놓았을 때 가슴속에 책의 의미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옛사람들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외려 오늘의 사람들이 들어야 할 꾸지람 같다. 동과 서가 서로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드는 일이 있는데, 플라톤의 주장과 유사한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한 언제나 단지 필묵이라 문자에 기대기 때문에 더욱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요즘은 책 읽는 방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필요한 정보만을 가려내 읽는 독서법도 널리 이야기되고 있다. 이런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전에 비해 쏟아져 나오는 책의 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당에 그에 걸맞는 읽기 방법이 나와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떤 독서법이 인기를 끌더라도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게 있다는 뜻이다. 주자는 그것을, 요샛말로 표현하면 '깊고 느리게 읽기'로 정의했다.


책읽기란 "마치 과일을 먹는 것과 같다. 처음에 과일을 막 깨물면 맛을 알지 못한 채 삼키게 된다. 그러나 모름지기 잘게 씹어 부서져야 맛이 저절로 우러나고, 이것이 달거나 쓰거나 감미롭거나 맵다는 것을 알게 되니, 비로소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꼭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다. 이런 빛나는 비유가 여러 군데 나오는데, 책읽기가 마치 약을 먹는 것과 같다는 내용도 눈길을 끈다. "한 번 복용하고 어떻게 병이 나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복용하고 또 복용하고 여러 번 복용한 뒤에나 약의 효능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고갱이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 첫째는 실천하라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들은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바로 행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너무나 익숙한 이 말을 우리는 삶속엣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비판적 독서야말로 가장 귀하다는 말이다. "진정 선배들을 망령스럽게 논의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 행위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어찌 해가 되겠는가! 진정 근거도 없이 주장을 펴는 것은 옳지 않지만, 독서하면 의심이 생기고 어떤 견해가 생기니, 어쩔 수 없이 주장을 펴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비판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주자 가라사대, "여러 학자의 주장을 정밀하게 살펴서 서로 비교하고 아울러 그 옳음을 추구하다 보면 합당게세 분별되는 상태가 저절로 생길 것이다".


옛것의 가치가 함부로 폄훼되는 시대다. 그러나 주자의 글을 읽다 보면,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리석어 잊어버린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주자서당은 어떻게 글을 배웠나>에서 오늘엗 여전히 유효한 옛사람의 지혜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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