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사무실에 오셨다.

by 이수정

전화가 울린다. 시어머니다.
"애기야... 내가 오늘 니 사무실로 잠깐 가려고 한다. 니들 다 바쁜데 밥은 제때 챙겨 먹어라.. 애기 네가 일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우리 강아지 좋아하는 장조림이랑 연근 좀 조렸고.. 얼갈이가 싸길래 몇 단 담갔다. 애기 좋아하는 총각무도..."

큰 키에 허리가 불편해 멀리서 봐도 걷는 모습이 대번에 티 나는 시어머니가 사무실로 직접 반찬을 싸들고 오셨다. 다른 한 손엔 자잘한 귤이 담긴 퍼렁 비닐봉지를 드시고..

"에이.. 어머니.. 힘들게 뭐하러 여기까지 오세요? 제가 가면 되는데.."

어머니는 싸오신 반찬거리를 내려놓자마자 굽은 허리를 펴서 휴~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시기가 무섭게 김치는 밖에 하루 이틀 두어서 살짝 익힌 후에 냉장고에 넣으라는 등 이런저런 당부를 덧붙이신다. 그리고는 내 책상 옆에 의자를 당겨 앉으시곤 "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일해라" 하신다. 그리곤 일하면서 먹으라며 대 여섯 개의 귤을 가지런히 까놓으신다.


난 어머니가 까놓으신 귤을 쏙쏙 입에 집어넣으며 달고 맛있다고 호들갑을 떤다. 평상시 내 감정표현의 다섯 배쯤 되는 리액션이다. 어머니 눈 아래로 보기 좋은 주름이 그려진다.

아들 딸 셋 낳고 70이 넘는 나이까지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신 어머니, 젊어서 낚시하러 한 달씩 집을 비우셨다는 아버님에게 이제야 가끔 큰소리치시고, 평생을 절약해 모으신 돈으로 작은 아파트 하나 마련했지만, 아파트 매매가의 8할이 자식들의 대출이니 어머니의 휜 등과 허리가 더 애처롭기만 하다.


그런 어머니가 들고 오신 시장가방 안엔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생의 피곤함이 담겨있고, 며느리와 손주를 향한 애틋함이 담겨 있으며 나는 흉내도 내지 못할 손맛의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가끔 SNS를 통해 친구들의 시댁 사정을 알게 된다. 오랜만에 간 시댁에서 어머니가 본인 쓰시던 명품백을 주었다던가, 시부모님이 아이의 사교육비를 모두 대주고 있다던가, 시부모님 내외가 때마다 해외여행 다니신다는 이야기,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 쇼핑 가서 얻어 입었는데 맘에 안 든다며 어머니의 패션감각을 트집 잡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친구들을 한편으론 부러워하다가도, 그 친구들이 주말에 시댁 갈 땐 꼭 정장 입고 가야 한다고 투덜거리거나 함께 식사하는 게 너무 불편해서 가기 싫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 편하게 시댁 가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머리에 앉았다가 낮잠 늘어지게 자고 나면 반찬 바리바리 싸서 집에 보내시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내 시댁이 낫지 싶다.


책상 옆에 잠시 앉았다가 며느리 일하는 거 방해될까 허둥지둥 돌아가시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들어오니 어머니가 앉으셨던 의자가 휑하다. 의자 옆에 놓인 검정 시장가방. 그 안엔 행여 냄새라도 퍼져 며느리 들고 가는 길에 지하철 탄 사람들이 눈살이라도 찌푸릴까 몇 겹씩 꽁꽁 싸맨 작은 봉지들이 들어있다. 반찬통도 아닌 봉지에 담긴 김치들. 문득 배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가방 속 작은 봉지들을 꺼내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준다.


"어디 보자! 이건 루이뷔통 총각무! 이건... 샤넬 장조림이네! 그리고 이건 구찌 얼갈이김치, 와~ 맛있겠다. 에르메스 연근조림!"

주인공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결코 끊을 수 없는 일일 막장드라마 같은 삶 속에서 가끔 만나는 휴먼다큐가 감동적인 이유는 그 안에 존재하는 등장인물들이 내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사람들 이기 때문이고, 또 그 안엔 나에게만 특별한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이 글을 보실 일은 절대 없으시겠지만,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아오신 그 일생을 온전하게 수긍하고 찬양한다. 어머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