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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17. 2018

뒹굴거린 일요일의 죄책감

나 일 중독자인 거니?

"내일 비 오면 어쩌지?"


"니들 그 이야기 들었어? 우리 학교 체육관 지을 때 말이야. 중간에 한번 무너진 적이 있는데, 그때 일하던 인부 아저씨 한 명이 죽었데. 그래서 우리 학교 소풍갈때 마다 비가 온데. 그 영혼이 원한을 가져서..."


"꺄악~" 소녀들이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참 이상하다. 왜 소풍 가는 날엔 비가 올까? 국민학교의 운동회도, 중학교의 소풍도, 고등학교의 수학여행마저도 우리가 기다리는 날엔 꼭 비가 온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엔 비가 오지 않았던 소풍과 운동회가 더 많았다.


엄마가 사준 밤색 체크무늬 반바지와 새 운동화를 신고 갔던 소풍도 찬란한 햇빛 속의 사진으로 남아있고, 파란색 머리띠를 한 단발머리의 나도 우리 팀 청군을 응원하는 하늘의 계시라고 믿었던 파란 하늘 속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얼마나 소풍에 대한 기대가 컸으면 모든 학교들마다 비가 오는 소풍날을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전설이 만들어졌을까.

운동회 날 새벽, 고소한 참기름 바른 김밥 냄새에 이끌려 눈을 뜨고, 평소 못 먹던 바나나와 삶은 계란들을 엄마에게 다짐받고 학교를 향하던 그 때, 라디오 방송에 엽서를 보내고 혹시 내 글을 읽어줄까 라디오 옆에 누워 숨죽이고 방송을 듣던 시간들, 버스정류장에서 매일 스쳐 지나던 남고 학생이 미소를 짓던 순간, 좋아하던 총각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눈을 마주쳐 주신 순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커피전문점에 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찾아왔을 때 들리던 나의 심장소리는 얼마나 컸었는지,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애써 심호흡하던  그때의 설렘. 그때의 심장박동은 분명 비바체였다.


이 세상은 온통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사랑은 시간을 잊게 하고,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한다."라고 했던가

시간이 흘러 불혹의 나이가 훨씬 지난 어느 날, 밥벌이에 지쳐버린 지인들 몇이 모여 얼마 동안만이라도 이 도시를 떠나자고 했다. 다들 대범하게 자신의 삶에서 탈출하겠다 큰소리쳤지만 겨우 만들어낸 시간은 1박 2일. 그것도 어렵게 만들어낸 기회이니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는데 동의하며 겨우 한 발만 삶에서 슬쩍 빼내는 흉내를 내었다.


출발하기 전 날, 여행가방을 싸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뭐가 빠진 거지? 이 느낌은 뭐야?'

한참을 의아해하던 나는 비로소 무엇이 빠졌는지 알게 되었다.


'설렘'이 사라졌다.

여행뿐이 아니다. 뭘 해도 그렇다. 아주 즐겁거나 너무 슬픈 일이 없다. 더 이상 흥분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우울해서 죽을 맛도 아니다. 한때 유행한 어떤 개그맨의 말처럼 일하고 소고기 사 먹고, 다시 일하고 소고기 사 먹는 그런 일상 들. 지금의 편안함만 있는 삶. 더 이상의 설렘이 없는 나.


마치 노회한 주막의 주인장처럼 펑퍼짐하게 눌러앉아 푼돈 짤랑거리며 앉아있는 나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늙은' 거였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한 시인의 말대로라면 난 마음으로 늙어가고 있었고
내 심장의 박동은 안단테를 지나 아다지오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 내게 열정은 버겁고, 희망은 모호하고, 떨림은 부끄럽다.
시간은 빨리 흐르고 돌아보니 삶의 자국은 남아있지 않고

놀랍게도 벌써 6월이 반이 지나갔다.


묻고 싶지 않지만 나 만이 내게 할 수 있는 질문


"아! 이번 생은 망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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