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동안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다. 스토커의 이니셜을 따서 S라고 부르자.
한 가지 확실한 건 S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S가 바라는 건 나의 편안함과 안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가끔은 치맛바람 센 초등생의 엄마처럼 나를 위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민망하게 만들어버리곤 했다.
중요한 점심 약속이 있는 날, 아침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로 발을 동동 구르며, '새벽잠을 줄였어야지'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을 때 S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일하느라 좀 늦었다고 말하면 되잖아. 너의 일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해? 그리고, 그 사람도 바쁘게 일하는 네 사정을 이해해줄 거야. 넌 늘 바쁘잖아. 왜냐면 넌 열심히 사는 사람이니까...'
'그래! 난 열심히 사는 사람이고, 난 늘 바쁘니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이해받을 만한 일이야' 라며 S의 의견에 동의해버리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이내 약속 장소에 앉아있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늘 그렇듯 후회한다. '젠장. S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내가 S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하게 된 것은 오래전 TV에서 본 우루사 광고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달고 사는 피곤함. 그 피곤함은 마치 등에 업힌 새끼곰처럼 사람들에게 매달려있고 우루사를 먹으면 "피로야 가라!"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검은 그림자를 드러 매 치기 해버릴 수 있다는 광고. 그 광고를 본 순간 난 어렴풋이 S의 존재를 형상화할 수 있었다.
나의 S는 또 다른 모습으로 TV전파를 탔다. 이번엔 다이어트 전문병원 광고였다. 검은 피곤함보다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본성은 더 악질이었다. 젊은 여성이 운동을 하려고 집을 막 나서는 찰나 어깨 위에 앉은 지방덩어리는 '내일부터 해~ 내일부터 해~'라고 말한다. 잠시 후 여자는 "에이 내일부터 하지 뭐!" 라며 운동 가는 것을 포기한다.
커피숍에서 주문을 하는 여자. 어깨 위에서 지방덩어리가 "캐러멜 마끼아또~ 아이~ 캐러멜 마키아토~"하고 주문을 외자 여자는 "캐러멜 마키아토 주세요"라고 말한다. 결국 여자의 어깨 위에서 라따뚜이처럼 여자를 조정하던 지방덩어리. 마치 나의 S 같은
한 순간 난 홀연히 마치 여래가 해탈하듯 나를 조정하고 있던 S의 존재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 어깨 위에 앉아서 귓가에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며 나의 편안함과 안락을 대신 선택해주던, 잠시도 쉬지 않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며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키던 존재. S! 나이지만 내가 아닌 그렇지만 결국은 '나'인 S!
S의 존재를 알아차린 나는 불쾌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은 단순히 DNA의 숙주"라고 했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 때만큼이나.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그리고 인간의 뇌까지 무려 3개 층의 뇌를 가진 나. 그런 세상에서 가장 진화한 나를 움직인 것은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파충류의 뇌. 나의 S였다.
누군가는 S를 코끼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코끼리 위에 올라탄 기수가 자신이고, 기수는 결코 코끼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없다고... 그 비밀스러운 존재와 마주하게 되자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S와의 정면대결이었다.
가늠하기 어려운 신의 존재를 우리는 인격 화하여 떠받들듯, S를 형상화했다.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나왔던 마시멜로 덩어리 같고, 끈끈하고 축축 늘어지는 사지를 가진, 편안함과 안전만을 추구하는 못생긴 존재. S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나서서 나의 선택을 대신해주었던 사실상 내 삶의 주인이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이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이야기한다.
"얘야, 사람들은 마음속에 2마리의 늑대를 키운단다. 한 마리는 흰색 털을 가진 늑대인데, 희망, 꿈, 열정, 선의, 배려라는 이름을 가진 늑대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검은색 털을 가진 늑대인데, 시기, 오만, 질투, 나태, 분노라는 이름을 가진 늑대란다. 마음속에서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곤 하지"
무릎에 앉아있던 손자가 묻는다. "할아버지, 두 마리가 싸우면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손자를 지긋이 바라보던 추장은 빙긋이 웃으며 손자에게 말한다.
"먹이를 많이 주어 키운 늑대가 이기지."
나는 세상이라는 정글 속에서 싸우기에 적당하지 않은 존재였다고 스스로를 보호하며 대신 세상으로 내보냈던 나의 대역. S
잘못된 결과에 책임을 미루기 위해 내가 만들어놓은 나의 분신. S
여태껏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존재는 내가 먹이 먹여 키운 나의 검은 늑대였던 것이다.
내 인생의 모든 시간을 함께 한 S를 버릴 순 없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결정을 S에게 맡길 수 만은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깐만 조용히 좀 해봐!"라는 단호한 말로 S의 입을 잠시 다물게 하는 것이다.
S가 잠시 입을 다고 있는 동안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고려하는 것.
잠시 pause를 누르고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격을 넓히는 것. 그것뿐이다.
S가 자그마한 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밤이 늦었어, 이제 그만 교정하고 브런치 발행 버튼을 눌러! 이 정도면 됐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두세 번 교정했으면 훌륭한 거라니까! 어서 자라고'
내가 말한다. "잠깐만! 조용히 좀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