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어른 사이에서
내가 정의하는 꼰대는 '답정너'에 '나이'를 더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대략 50대를 넘어서면서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에 정해진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꼰대일 확률이 높다.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표현의 한계로 인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정의하는 꼰대의 범주에 내가 들어가게 된 시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일명 '꼰대질'을 하지 않기 위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의 반성과 변명의 중간 정도 되지 싶다.
가상의 담(wall)을 하나 세워보자. 나는 지금 그 담의 위에서 위태롭게 걷고 있다. 그 담벼락 위에서 내려와 세상에 안착해야 하는데 왼쪽으로 떨어지면 꼰대,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어른이 된다. 그 담이 의미하는 나이는 개인마다 다르겠으나 내 개인적인 기준은 50세 전후다. 이 담의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을 예비 꼰대라고 부르자. 물론 예비 어른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예비 꼰대라고 불러야 스스로를 성찰하는데 강한 임팩트가 있으리란 생각이다. 이 가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예비 꼰대라는 단어를 예비 어른이라고 바꾸어 읽으면 된다.
1. 예비 꼰대는 조급하다.
엊그제 열린 러시아 월드컵 예선전 스웨덴과의 경기를 떠올려보자. 젊었을 때 세상을 보는 관점은 경기가 막 시작되어 10분 정도 지난 시점, 상대의 진영에서 우리 선수들이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뭘 해도 우리는(나는) 잘 될 것 같고, 승리를 향한 열정에 마음이 달뜬다. 이에 비해 예비 꼰대가 되어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가 스웨덴에게 페널티 킥으로 한 점을 내주고 후반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을 때의 마음과 같다. 우리가(내가) 지는 것은 아닐까? 10분 남았는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전반전의 열정과 희망은 두려움과 불신이 되어 예비 꼰대들을 괴롭힌다.
꼭 기억하자. 박지성, 안정환, 이영표가 자신들의 경험을 살려 마지막까지 목이 터져라 외쳤던 말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조급해질수록 한 템포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자.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조급해지면 힘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면 그 경기는 망한다. 몸과 정신 모두 힘을 뺄 줄 아는 것이 어른의 역량이다. 아직까지 우리에겐 30년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다.
2. 예비 꼰대에게 세상은 입 말고 지갑을 열라고 조언한다.
세상에서 소비되는 "OOO 하는 방법 OO가지"류 들의 글을 보면 팔도 비빔면에 유동 골뱅이 넣어 비벼 먹듯 입에, 귀에, 뇌에, 마음에 착착 감긴다. 그중 하나가 '나이 먹을수록 입 보다 지갑을 열라'는 말이다. 일견 그럴듯한 말이지만 그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지갑에서 나오는 것보다 가치가 낮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워렌 버핏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사기 위해 20억 원이나 되는 식사를 사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 끼 식사값만큼도 안 되어 입 다물고 지갑만 열어야 한다면 이런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행복한 가정은 "선배님! 정말 좋은 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후배님! 후배님이 내 나이 되어 후배님의 후배님에게 사주는 걸로 하시게나" 하며 쿨하게 지갑을 여는 모습이고, 가장 슬픈 가정은 모임이 끝나기도 전에 "선배님 잘 먹었습니다!"하고 지들끼리 2차 장소 정하며 우르르 몰려나가는 모습이다. 어찌 되었건 지갑은 열어야 하는구나.
자기계발서 100권 읽어 짜 맞춘 조언이 아닌 내 삶에서 직접 찾아낸 살아있는 아포리즘 한 두 개는 갖고 있자.
단 강압적으로 원하지도 않은 이에게 설파하는 것은 금지다. 다행히도 나의 아포리즘을 듣기 원하고 즐겁게 들어준 이들에겐 감사의 표시로 밥 값을 계산하자. 기꺼이 입도 열고, 감사히 지갑도 여는 것이 윈윈 전략이다. 똑같은 레퍼토리는 금지. 같은 후배에게 같은 말 두번하지 않기! 아~ 어렵구나!
3. 예비 꼰대는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예비 꼰대들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이나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사무실이 연남 동인 탓에 "요즘 거기 핫하다며?" 라며 연트럴 파크에서 만나자는 요청이 많다. 어렵사리 약속 장소를 정해 하나 둘 친구들이 모이면 꼭 나오는 말이 "여기 젊은 애들 오는데 아니야?" 라던가 "우리가 물 흐리는 거 아니니?" 혹은 "안주 좀 많이 시켜! 눈치 안 보이게" 등이다. 남자 사람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정할 땐 "부장님들 많이 오는 술집으로 정해"라는 당부들이 난무한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젊음"이 옳은 것, 좋은 것, 선하고 주류인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나이 먹음"이 옳지 않은 것, 나쁜 것, 악하고 비주류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일종의 자격지심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이 먹음"이 동반할 수 있는 안하무인과 아재스러움과 주변을 상관 안 하는 큰 목소리와 주변을 제압하는 자기 확신이 옳지 않음이요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격지심을 떨쳐버리자. 동시에 아줌마와 아재의 주책스러움도 함께 떨쳐버리자. 그 빈자리에 우아함과 젠틀함을 채우자. 내가 생각하는 우아함과 젠틀함은 낮고 작은 목소리, 부드러운 표정,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기다림이다. 개인의 우아함, 젠틀함은 자신의 취향대로 스타일링하면 된다.
4. 예비 꼰대는 칭찬에 목마르다.
자식들은 이제 막 성인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 부모를 지붕 위의 닭처럼 보고 있고, 배우자와는 일종의 전우애가 돈독해졌을 시점이다. 회사에선 부하직원들을 위한 코칭의 일환으로 요령 있는 칭찬법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예비 꼰대들에겐 어떤 루트로도 긍정적인 스트로크가 유입되지 않는다. 사랑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데, 칭찬을 받아봤어야 칭찬을 할 것 아닌가?
"부장님! 부장님의 경험과 통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팀장님과 한 팀에서 일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 나도 선배 같은 윗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엄마, 아빠!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 아빠예요"
생애 최고로 꼽을만한 이런 칭찬이 아니더라도 사소하고 일상적인 칭찬조차도 예비 꼰대를 희색만면하게 만들지 않을까?
이쯤 되면 어떻게 칭찬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내게 페이스북의 용도는 브런치 글을 공유하는 정도다. 평상시 대 여섯 개의 댓글이 달리는 수준인데 글의 내용이 의기소침하다던가, 생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에는 페북 친구였는지도 몰랐던 분들의 댓글이 우수수 달린다. (그래서 페북에 중독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람들은 타인의 좋은 일에 함께 즐거워해주지만 힘든 일에 더 많은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긍휼한 민족 아닌가!
그러니 가끔은 지인들에게 "나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라던가 "내가 잘하는 게 있긴 있는 걸까?"라고 툭 던져보자. 생각지도 못했던 나에 대한 생각의 커밍 아웃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약한 모습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는 것이 가끔은 도움이 된다. 세상이 원하는 건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 너그러운 어른이다.
어느 새 내가 이 나이가 되었을까? 요즘 또래의 누군가를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지금 내 나이대의 행복감이 가장 떨어진다고 한다. 오히려 이 시기를 지나면 삶에 순응하며 행복감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주변인의 질풍노도의 시기만큼이나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이 나이에 앞으로 내 삶이 과연 나아지기는 할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