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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22. 2018

젖은 기억 꺼내 말리기

마음이 젖어 강릉으로 갔다

베란다 문을 여니 밤새 밀려와있던 파도소리가 쏴아 하고 쏟아져 들어온다.
어젯밤엔 산책로에 서있는 가로등의 불빛만큼 바다가 보이더니 해가 떠오르자 내 시야의 삼분의 이만큼 바다가 차오른다.

무작정 강릉행을 결심하며 손에 잡히는 데로 넣어온 책을 후르르 넘기다 발견한 밑줄 그은 문장. 

'치유란 젖은 기억 꺼내 말리기' 

언제 그어놓은 밑줄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치유가 필요했었나 보다. 


어제 밤늦게 도착한 강릉의 한 호텔, 스탠드 하나만 켜 놓은 채 젖은 기억들을 꺼내 놓고선 추스를 엄두가 나지 않아 풀 먹인 린넨 시트의 침대에서 뒤척이다 새벽녘에나 잠이 들었나 보다. 두어 시간 잠들었나? 


동쪽 바닷가를 향한 객실에 햇살이 선물처럼 내리고 그새 몸과 마음이 햇살 아래 잘 마른 빨래같이 바삭거렸다.


'그래 조금 젖은 기억은 빨리 말려주는 게 좋지. 안 그러면 말리는데 오래 걸리거든...'


무턱대고 강릉으로 온 이유는 M을 만나기 위해서다. 첫 번째 배낭여행의 동반자였던, 나의 20대 중반 대부분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 나의 결혼식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M은 그 긴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엊그제와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조개구이집에서 주먹만한 대합을 구우며 M은 나의 일 이야기며, 남편, 아들의 이야기를 물었다. 수다와 서먹한 침묵이 번갈아 이어지다 M이 마침내 꺼낸이야기는 남편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경찰이었던 M의 남편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꽤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쌍둥이 딸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는 아빠를 하나는 엄마를 꼭 빼닮았다고 하며 웃었다. 


M의 남편은 사고를 당하고 열흘간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는데 뇌를 많이 다친 상태라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고, 깨어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사들이 말했다고 했다. M은 의사들이, 가족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M은 어쩌다가 교회의 합주 봉사단에서 플루트를 불게 되었는데, 한 번도 불어보지 않았던 악기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노라고, 이제 막 플루트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남편이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남편을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번, 그것도 딱 30분씩 이었다. 병원에 하루 종일 있으며 남편 옆에 있는 한 시간을 제외하곤 보호자 대기실에서 열흘을 지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기도도 할 줄 몰랐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손에 들려있던 플루트를 불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방음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보호자 대기실. 그곳을 가득 메운 풋내기 연주자의 플루트 소리가 꽤나 시끄러웠을 텐데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꼬박 열흘 동안 플루트를 불다 문득 이제는 남편을 떠나보내야겠단 생각이 들더란다. 열흘도 기적이라고 의사들이 말하고 있었다.


그날 밤 M의 꿈속에서 한 남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길을 떠났다고 했다. 

다음날 M의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났고 M은 딸 둘과 함께 이 세상에 남았다. 


열흘 후 M의 플루트 소리를 들은 합주 봉사단원들은 위로 반 염려 반으로 득음했냐고 물었는데 플루트의 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아해졌기 때문이다. M이 말했다. 애들 아빠가 떠나면서 자기 자리에 아름다운 플루트 소리를 남겨놓았다고.


그래서 M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연주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는 3년간 이어졌고 많은 환자들이 M의 연주에 위안을 받았다고 고마워한단다. 



타닥타닥 조개껍데기가 튀어 오르고, 어느새 맥주 3병을 나눠 마시며 나눈 이야기엔 슬픔도, 분노도 들어있지 않았다. 나 또한 어떤 동정도 연민도 섞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조개를 구우며 우리의 젖은 기억들을 조금씩 꺼내 그 숯불에 함께 말렸다. 


"인생은 드라마 같아! 그렇지?"


나는 연신 머리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어떤 드라마는 해피엔딩이고, 또 어떤 드라마는 코미디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모두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거다. 게다가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그 드라마의 연출자이자 작가라는 것!

M과 나는 서로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가장 비중이 큰 조연이 되어 주기로 했다. 그 조연이 해줄 일은 각자 살아가며 삶의 한 부분이 젖어버릴 때 그 순간을 꺼내어 함께 말려주는 것! 


강릉의 햇빛은 젖은 기억을 꺼내 말리기에 참 좋았다. 




."치유란 젖은 기억 꺼내 말리기"는 문요한 작가님이 쓰신 책의 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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