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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Sep 07. 2018

유로(Euro)화 위의 예술사

                             

유럽연합의 단일화폐인 유로(euro)는 1999년부터 유통되기 시작해 2002년 7월부터 전면적으로 통용되었다.

유로존(Euro zone)인 오스트리아·벨기에·키프로스·핀란드·프랑스·독일·그리스·슬로바키아·아일랜드·이탈리아·룩셈부르크·몰타·네덜란드·포르투갈·슬로베니아·스페인·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19개국에서 유로화만을 법정통화로 사용하게 된 후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각 나라의 특색 있는 지폐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행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실제 여행의 시작은 환전 과정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기가 다르고, 단위와 금액의 자릿수가 다른 다양한 지폐들 이야말로 여행에서 기대하는 이국적(異國的) 감성을 맨 처음 만나는 관문이 아니던가?


어린 왕자와 보아뱀이 그려진 프랑스의 50프랑 지폐를 기억한다면 이 아쉬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여행의 말미에서 한 장 남은 50프랑을 쥐고'이 지폐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오래 전 여행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마저도 앙증맞은 프랑스의 50프랑 지폐를 사용해보았으니 그것 또한 행운!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10년 전쯤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지폐 중 가장 큰 단위의 지폐는 1만 원권이었다. 1만 원권이 처음 사용된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총 36년간 국민소득이 증가하였음은 물론 물가도 큰 폭으로 올랐다. 사회 경제적으로 통용되는 금액이 커져감에 따라 수표 발행 및 관리에 드는 비용만도 2008년 당시 2800억 원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사회적 편의 확대를 위해 5만 원권과 10만 원 권을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고 십만 원권을 제외한 5만 원권만이 새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 5만 원권 지폐에 넣을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이었다.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의견들을 내어놓았고 주요 후보로는 백범 김구, 광개토대왕, 안창호, 장영실, 유관순, 신사임당 등이 물망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신사임당이 최종 결정되었는데, 결정 이후에도 많은 반대 의견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계의 반발이 심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여성의 이미지로는 너무 '현모양처'의 틀 속에 갇힌 수동적 이미지라는 이유였다. 더불어  다양한 음모론들도 있었는데 신사임당의 얼굴이 박근혜 전 대통령 혹은 육영수 여사의 모습처럼 그려졌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렇게 한 나라 안에서도 새로 만들 지폐에 어떤 인물을 그려 넣을 것인가애 관한 합의도 쉽지 않은 문제인데 유럽연합의 공통 통화인 유로화를 디자인하는 과정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괜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2002년 1차 유로화 발행을 앞두고 프랑스와 독일이 자국에 가까운 디자인을 사용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완전히 다른 콘셉트의 디자인으로 방향이 정해졌고, 공모전을 통해 최종 디자인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로베르트 칼리나의 디자인은 거의 모든 유럽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모티브로 삼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문화유산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시대별 문화예술사조를 표상화하여 집어넣은 것이다.


5유로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예술 양식이, 10유로에는 로마네스크, 20유로에는 고딕 양식, 50유로에는 르네상스 양식, 100유로에는 바로크와 로코코, 200유로에는 19세기 근대 양식, 500유로에는 20세기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 그려져 있다. 이 순서는 시대적 흐름과 동일한데, 화폐의 금액이 적을수록 오래된 과거의 예술사조라고 보면 된다.


2013년엔 수정된 디자인으로 2차 발행되었는데 이때 500유로는 발행하지 않았다. 500유로가 부정부패와 범죄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5만 원권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전 같으면 서류가방에 1만 원권을 가득 채우면 7천만 원 정도가 담겼는데 5만 원권으로 채울 경우 약 5억 원이 담긴다고 한다.

 

그 덕분에 어떤 사과상자는 사과를 담는 이외에 다른 용도로 귀하게 여겨지다가 2009년 이후 찬밥신세가 되어버렸고 빼빼로 박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단다. 빼빼로 상자에 5만 원권이 110장, 550만 원이 들어간다고 하니 빼빼로가 태생과 달리 빼빼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5만 원권 덕분이다.


11월 11일에 누군가 시크하게 "오다 주웠다"라며 빼빼로 박스를 전해주거들랑 그 상대가 마뜩잖더라도 내용물을 꼭 확인해보도록 하자!






다시 유로화로 돌아가 화폐의 디자인을 살펴보자.


5유로에는 모든 유럽 문화의 전형인 로마의 아치형 대문이 디자인되어있다. 전투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군인들의 승리를 환영하는 개선문은 문의 통로를 아치형으로 만들고, 문의 기둥과 지붕에 승리와 관련된 다양한 장식물로 꾸몄다. 돌이나 벽돌 등을 반원형의 곡선 모양으로 쌓아 올린 아치는 로마 건축에서 널리 일반화되어 로마 건축을 상징하는 특징이 되었다.


왼쪽: 로마 고전주의 대문 도안이 그려진 5유로 지폐 /  가운데: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 / 오른쪽: 타이투스황제 아치






10유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그려져 있다. 로마네스크란 "로마스러운"이란 뜻으로 로마의 양식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점점 발전된 형태를 갖추어갔다. 로마네스크의 특징인 벽면 기둥에 붙이는 장식적인 요소인 필라스터와 조금 더 발달한 아치구조의 특징이 화폐에 잘 드러나 있다. 화폐의 디자인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들을 비교해보자.


좌: 로마네스크 양식의 도안이 그려진 10유로 지폐(신권)  / 중: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생트로핌 대성당 /우: 에스파냐의 산타 마리아 델 캄포 성당




20유로에는 우리가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고딕 양식의 창문이 그려져 있다. 문화예술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교회가 지금은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유산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그 자태만으로도 인간을 압도하고도 남을 고딕 양식과 화려함의 극치인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은 우리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예술사조일 것이다.


좌: 고딕양식의 도안이 그려진 20유로 지폐(신권) / 중: 고딕양식의 파리 노트르담 성당 내부에서 본 창문 / 우: 고딕양식의 대표 파리 노트르담 성당



50유로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파사드가 그려져 있는데 르네상스 양식의 특징이라면 고딕 양식에 비해 수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조화와 질서, 균형과 통일에 의한 형태미를 추구한다는데 있다. 높이에 집착하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질서와 비례, 균형을 강조하였다. 그러다보나 르네상스 시대엔 고딕 양식에 비해 차분하고 절제된 느낌의 외형들을 가진 건물들이 만들어졌다.


좌: 르네상스 양식의 도안이 그려진 50유로 지폐 (신권) /중: 르네상스 양식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피렌체) / 우: 르네상스 양식의 성안드레아 성당 (이탈리아 만토바




                                          

100유로에서는 바로크 양식의 특징이 그려져 있는데, 이전 르네상스의 특징에 비해 더 화려한 장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등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에서 만나는 모든 건축물들이 그렇지만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을 볼 때면 어떻게 돌로 이런 걸 만들어내지? 정말 사람이 한 것 맞나 싶을 정도의 경외감을 준다. 내가 특히 100유로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가치가 13만 원 정도 되어서가 아니라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의 절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



좌: 바로크 양식의 도안이 그려진 100유로 지폐(구권) / 중: 바로크 양식의 산티 빈센초 에 아나스타시오 성당(로마) / 우: 바로크 양식의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200유로와 500유로에는 각각 19세기 근대 양식, 20세기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 그려져 있다. 500유로는 일반적인 여행객들이 볼 일은 별로 없을 듯하고, 200유로짜리도 사용하기엔 매우 불편하다. 그래도 뭐 그냥 준다면 받기는 할 거다. 자료를 찾다 보니 500유로가 주로 쓰이는 상황을 나무 위키에서 적어놓았는데, 재미있어서 그대로 실어본다.


"500유로는 명품을 현금으로 지르고 싶을 때, 아니면 10명 넘게 단체로 외식할 때, 유로존에 해당하는 국가 내 스포츠 클럽 팀(예를 들면 프로축구)이 운동선수 이적료를 현찰로 지급할 때 정도 말고는 쓰일 일이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번엔 500유로를 빼빼로 박스에 담으니 약 칠천만 원이 들어간다.

올해 빼빼로 데이엔 유로존에 가 있어야겠다.


이 글을 쓰며 새삼 느끼는 것은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터부시 할 필요가 없겠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유로라면 말이다. 어차피 돈이란 표상일 뿐이고, 그 표상을 장식하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에휴... 뭐래는 거냐....





빨리-많이-대충 에서 천천히-깊게-대화하는 여행을 만들어주는... 그림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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