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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성 Jul 11. 2024

기분이 어때요?

[센텐스로그]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묻는 문장들


요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눕니다. <인사이드 아웃 2>가 개봉한 즈음부터 였을 것 같아요. 전 아직도 못 봤지만(눈물) 주변에서 후한 평가와 함께 자주 언급하더라고요. 가장 인상 깊은 평은 “F를 위한 영화"라는 거였습니다. “F들끼리 단관 가서 펑펑 울어야 한다”고요. 1년 전, 수십 년 만에 E에서 I로 바뀐 것에 이어 최근 F에서 T로도 바뀐 제게 <인사이드 아웃 2>가 어떤 영화가 될지 더 궁금해집니다. <인사이드 아웃 1>은 극장에서 펑펑 울며 봤던 기억이 스치네요.


<인사이드 아웃 2>가 F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아마도 울퉁불퉁 다양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기 때문일 테죠. 1편의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에 이어 2편에서는 불안, 당황, 따분, 부럽까지 더해졌으니까요. 절대 MBTI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요즘 같은 무한 경쟁 + 배금주의 + 성공 숭배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 버티기란 더욱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즘만 그랬던 것도 아니죠. '감정적'이란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고 어렸을 때부터 “울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란 한국 사람들은 감정 표현, 특히 부정적이고 취약한 감정 표현에 무척 서툴기로 정평이 났으니까요. 그래서 다 큰 우리는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앉아 만화 영화를 보며 펑펑 우나 봅니다. 그런데 영화 <인사이드아웃> 시리즈의 세계적인 흥행을 보면 한국만의 특성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주부터 출판사에 출근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담당하는 팀에서도 수년에 걸쳐 감정과 마음을 다룬 책 다수를 펴냈습니다. 자신의 어렵고 힘든 마음을 인정하고 변화한 과정을 솔직하게 담은 두 권의 책 <검은 감정>과 <쉬운 일은 아니지만>을 다시 살펴보다가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을 발견했어요. 두 책의 저자 모두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는 데 서툴렀다 고백하는 대목이었습니다. 특히 <검은 감정>에서는 이런 태도가 방어기제 중 하나인 주지화이며 이해받지 못한 감정은 쌓였다가 폭발해 버리기 때문에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책 <쉬운 일은 아니지만> 중
책 <검은 감정> 중


제가 가진 똑 닮은 경험도 떠올랐습니다. 3년 전 우연한 기회로 처음 심리 상담을 받았습니다. 거주 지역 지원사업을 통해서였죠. 제게 필요한 줄도 모르고 신청했다가 덜컥 선정돼 참여한 것인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상담 첫날 제 얘기를 오랫동안 듣던 상담 선생님께서 “왜 기분을 물어봤는데 감정이 아니라 생각을 얘기하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제 감정을 얘기하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고요. 이 경험을 주변에 얘기하다 보니 이것이 심리 상담을 시작할 때 흔히 겪는 충격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 책에서도 보게 되었네요.


나머지 상담 동안 지금까지 내 감정을 어떻게 다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상담 후 얼마 간은 감정 일기를 쓰며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여전히 감정을 표현하기란 어렵습니다. 특히 저는 회피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관계에서 부정적이고 취약한 감정을 느끼면 습관적으로 더 굳게 입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제 모든 감정을 글에 솔직하게 담아내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들어 가끔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밍밍한 센텐스로그를 써버리고 말 때도 있죠. 그래도 어떻게든 감정을 소화해 글을 쓰려는 이유를 책 <검은 감정>에서 또 찾았습니다.



혹시 ‘434개 한국어 감정 목록 논문’ 보신 분 계시나요? 연속되는 우연은 정말로 인연인지 결국 이 글을 쓰게 만들었는데요. ‘감정'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 사이에 여러 차례 이 논문을 보게 됩니다. 트위터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랄라님이 캡처해서 보내주기도 하고 심지어 회사 상사는 논문을 통째로 던져주셨죠. 자세히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어 살펴보니 거의 20년 전 논문이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보다 싶었습니다.


434개 감정 목록에 낯선 단어는 없었지만 입으로 잘 뱉지 못하는 단어는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목록의 72%가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하더라고요. (아래 기사 참고)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나라 치고는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사뭇 놀라웠습니다.


목록에 나열된 수많은 감정 단어를 보며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오랜만에 짚어 보았습니다. 저는 또 습관 대로 감정은 숨기고 상황이나 생각을 제 기분으로 여기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가지 감정 단어를 골라 보았습니다. 상반된 것들이 공존하는 내 안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하나는 어렵고 둘은 아쉬우니까요.


'걱정하다' '설레다' '흡족하다'. 감정 단어를 고르니 왜 이 단어를 골랐는지도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생각은 그만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어디에 꼭 말하지 않더라도 당시의 적확한 감정과 감정의 근거를 인지하는 감각이 꽤 개운했죠. 앞으로 마음이 어려울 때 감정 단어를 몇 가지씩 골라봐도 좋을 것 같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분이 어때요?



written by 마감해서 시원스럽지만 불만족스럽고 긴장되는 치즈




지금 나의 감정을 묻는 책을 읽고 싶다면

책 <검은 감정> | 설레다

책 <쉬운 일은 아니지만> | 홍화정


434개 감정 단어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면

[논문] 한국어 감정단어의 목록 작성과 차원 탐색

[기사] 한국어 감정단어 434개 72%가 불쾌한 감정 표현


내 감정을 터놓을 대화가 필요하다면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




수입의 절반 이상을 콘텐츠 결제에 쓰는 전방위 콘텐츠 덕후들의 '센텐스로그'는 룰루랄라김치치즈 홈페이지에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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