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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호 Jan 14. 2024

완료되지 않는 시제의 사랑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 목정원(2023)


완료되지 않는 시제의 사랑


지난 연말, 생각지 못한 다정한 선물을 받았다. “요즘 글 쓰는 것도, 보는 것도 재미가 없어요. 글테기가 온 것 같아요.” 그는 언젠가 내가 토로한 고민이 생각이 나서 선물하는 거라고 했다. 사진이 많아서 술술 넘겨 보기 좋다면서. 나는 내가 이토록 사려 깊은 선물을 받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가슴께가 뜨끈한 기운으로 뻐근했다. 모름지기 선물은 받고 빠른 시일 내에 사용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선물을 받았을 당시엔 글테기가 어느 정도 나아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귀한 선물인 만큼 최대한 적절한 시기에 펼쳐 보고 싶었다. 해서 1월 1일, 올해는 글테기가 찾아오지 않길 바라며 한 해를 여는 책으로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의 책장을 넘겼다.      


본격적인 사진(산문)집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잡지나 뉴스의 사진을 볼 때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나는 의식적으로 사진을 ‘읽자’고 생각했다. 작가가 이 사진을 왜 찍었을지. 왜 이 사진 다음에 그 사진을 실었는지. 이 사진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지. 나름대로 사진을 독해하려 했고, 그래서 글로만 이뤄진 책 못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책장을 닫은 지금은 알 것만 같다. 사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표지와 제목에 다 담겨 있다고.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는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가 액자처럼 음각되어 있고, 그 자리를 전면 표지는 설산의 흑백 사진이, 후면 표지는 새까만 빈 공간이 채우고 있다. 책을 펼칠 때는 있었던 것이 덮을 때는 없는 것. 있었던 것이 없어짐으로써(부재의 빈칸으로써) 그것의 있음을 증명하는 것.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모두 담겨 있지만, 표지를 넘기고 그의 사진을 조우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그의 사진은 햇빛에 오래 두어 색이 바랜 사진 같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 것인지, 후보정을 통해 채도를 낮춘 것인지, 방법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은 응당 너무나도 당연한 조처다. 찬란했던 시절은 가고 당신이 없(을 것이)으므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온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려 해도 이전과는 절대 같은 풍경일 수 없을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휘발되고, 침식되고, 풍화되고, 퇴색되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순간들. 그 애달프고도 자비로운 기억의 섭리. 책의 후반부를 흑백 사진으로만 채운 것은 순전한 우연일까? 우리가 통과한 시간이 찬란했던 만큼 기억의 색은 바랠 것이다.      


사진의 모호한 색채는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따르는지 방증하기도 한다. 세상에 100만 개의 색이 존재한다면, 그의 사진 속 세계에는 50만 개의 색만 존재하는 것만 같다. 우리의 기억은 편집과 왜곡에 능하다. 기억은 순간을 온전히 복사하는 비효율적인 방식 대신, 장면의 중추가 될 만한 것을 선별적으로 각인한다. 50만 개의 색이 남지만 그것은 잘못된 기억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들만이 남으므로 기억의 정확도는 높아진다. 이는 지금 이 순간이 어차피 지나가고 잊힐 순간이래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만 하는 깨달음과도 연결된다. 매 순간순간은 분위기로, 감각의 총체로, 감정의 총체로, 여러 다른 이름의 ‘기억’으로 남을지니.       


또 하나 괄목할 것은 사진에 풍경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주체처럼 보이는 사람이 존재하더라도 페이드아웃 되었거나 뒷모습이거나 아주 먼발치서 찍어 형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의도적인 편집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풍경의 주체는 프레임 바깥, 즉 사진가와 그의 동행인이다. “여기 실린 사진들을 저는 어느 과거에, 누군가의 전미래에 찍었습니다. 그저 떠돌다 장면을 발견하면 그에 항복하듯, 실패하듯 셔터를 눌렀(239p)”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과거의 한 시점에 미래의 나와 당신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우리의 부재를 발견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처럼, 혹은 실험실이 폭파되어 버린 과학자처럼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사진을 찍고 나니 그것은 결국 우리였다.       


항복했건 실패했건, 중요한 것은 화자가 (사진을 전하는 전미래의 시점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당신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수신인에게 닿는 데 성공한 사진이 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침묵이다. 사진의 주체가 소거되었으므로 다른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침묵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164p)”한다. 당신은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은 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랑을 마주한 이에게 이별의 예언만큼 비극적인 소식이 또 있을까? 그러나 사진의 수신인을 가엾게 여기기엔 이르다. 수신인은 전미래에 이별을 깨달았을 뿐이지만, 화자는 아주 먼 과거에 그 고통을 인지했다. 사진을 찍은 순간부터 당신과의 이별을 알았기에 그의 사랑은 현재 시제가 아닌 현재 완료 시제이며, 훗날 화자는 “한때 사랑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75p)”는 사진을 보고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이 남을 것(75p)”이라며 시제를 다시 한번 연장한다. 그리하여 침묵하는 사진은 영원히 완료되지 않는 시제가 된다. “언제나 현재적인 고통과 사랑(164p)”을 증명해 내고 영속을 획득하고야 만다. 어떤 사랑과 기억은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기억, 더 나아가 이별을 수혜 받을 이는 연민의 대상보다 축복의 대상임이 마땅하다.    

  

사진은 ‘있음’을 포착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의 사진은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의 자리가 ‘비워져 있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아주 오래된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는 나를, 그 공허의 블랙홀에 질식당하지 않은 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을 기다리는 순간마저, 당신을 사랑하는 순간이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악보 하나만을 바라보며 선율을 만드는 연주자들. 내 삶에도 의지할 수 있는 악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장 수집


당신의 사진을 볼 때, 나는 당신이 죽을 것을 동시에 본다. 어느 미래에, 당신이 죽어 없을 것이라고, 사진은 끝없이 말하고 있다. 066p     


촬영된 이미지를 일별하는 것만으로 내게 그 사진은 영영 존재한다. 한때 사랑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며. 그리하여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이 남을 것이다. 이때 사랑은 여전히 과거형일까. 아니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탈주하여, 시대착오적으로, 현재형일까. 수많은 시대착오적인 고통이 그러하듯이. 075 & 85p     


침묵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말할 수 없는 무언가, 그 실재는 구멍 속에 남겨둔 채. 여기 폐허조차 되지 못한 검은 구멍이 있다고. 언제나 현재적인 고통과 사랑이 있다고. 침묵은 전하고, 우리는 추락한다. 164p     


여기 실린 사진들을 저는 어느 과거에, 누군가의 전미래에 찍었습니다. 삶의 모양을 알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떠돌다 장면을 발견하면 그에 항복하듯, 실패하듯 셔터를 눌렀습니다. 두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갖고 오고 싶었습니다. 미래로. 없는 당신에게로. 이 답장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까. 239p     


시작일: 1월 1일 ~  완독일: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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