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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yuun Dec 10. 2023

판화의 즐거움

집에서 혼자 리놀륨 판화 만들어보기

11월 초 한남동 아스티에 드 빌라트에서 본 ‘휴고 기네스 (Hugo Guiness)’ 판화 전시를 보고 단순한 선과 동양화적 매력에 반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물들을 단순한 모양들로 표현한 그림들이 왠지 모르게 예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들었다.


예전에도 판화를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도구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인내심이 부족해서 한번 해본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 서랍속 깊은 곳에 판화 도구들을 넣어놓고 한 4-5년이 흐른 것 같다. 그때도 아마 핀터레스트에서 휴고 기네스 작품을 보고 반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판화 도구 쇼핑몰에서 판화용 수성잉크도 사고 판화 용지까지 한번 구매해보았다.


판화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판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리놀륨판으로 만드는 판화가 가장 쉽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많은 판화 기초 튜토리얼을 통해 리놀륨 판화의 기본적인 프로세스들을 다시 상기시켰다.

내가 참고한 리놀륨 판화 튜토리얼

아직은 맘에 드는 그림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기보다 판화 매체에 보다 익숙해지고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했다. 매체를 다루는 기본적 테크닉에 익숙해져야 표현하고 싶은 것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판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어느 수준의 복잡성으로 도안을 그릴지, 판화에 더 어울리는 그림체와 선, 화면 구성은 무엇인지 체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다른 작품을 보고 따라 만들어보는 연습을 했다. 판화는 그림과는 달리 스케치를 한 후 분명한 선들을 통해 경계를 만들고 검정색이 될 부분과 흰색으로 남겨질 부분들이 어딘지 명확히 구분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스케치는 리놀륨 판에 전사가 되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스케치를 여러번 반복해서 그리는 과정이 많다.



스케치를 반복적으로 해나가면서 선들이 더 단순해지고 딱 필요한 선들만 점점 남기게 되었다. 스케치가 스케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중에 파낼 것도 생각하니 불필요한 복잡성은 의도적으로 제거 하게 되는 것 같았다.

판화 파내기 시작

오랜만에 판화칼을 잡고 파는데 생각보다 파내기가 너무 힐링 됬다.


그림 선만 명확히 잡아지면 그림 자체에 대한 고민은 앞단계에서 마무리 된 것이다 보니 정교하게 파내는 작업에만 신경쓰면 되서 그런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결과물의 퀄리티는 예측할 수 없지만.. 파낼 때 만큼은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선을 따라 실수 없이 파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습작이다 보니 판화용지가 아닌 갱지에 찍어보았다.

오랜만에 거의 처음 해본 판화여서 잘 안찍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선이 깔끔하게 깎이고 잉크도 선명하게 찍혀서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처음에 비교적 쉬운 도안으로 매체를 익히기 위한 손 풀기를 하고나니 조금 더 복잡도가 있는 도안을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두번째 습작을 해 볼 판화 작품 서칭하다가 발견한 아래 그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펠릭스 발로통 (Felix Valloton)의 작품

백조 무리가 있는 이 그림이 정말 매력있게 느껴졌고 물 표현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보기에는 엄청 어렵지 않아보였는데 스케치를 하며 깨달았다.. 따라만들기 쉽지 않은 도안이었다.


백조를 힘들게 그리고 나니 그림 상단의 물결 무늬를 그릴 힘이 없어 그냥 나중에 칼로 흰 부분을 파내기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파보니 일정한 선이 아니라 길이도 들쭉날쭉하고 두께도 고려해야하여 사전에 스케치를 하지 않은 것이 최종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긴 했다.

리놀륨판에 전사한 그림

판화는 도안에 따라 잉크 양 조절하는 것도 경험이 쌓이며 감으로 익혀야한다. 잉크를 아끼느라 처음에 적은 양으로 찍어냈더니, 이 그림은 검정 면이 많아 군데군데 잉크가 부족한 것이 보였다.

두번 째로 찍을 때는 잉크를 듬뿍 짜내어 찍었다.

잉크도 너무 많으면 안된다. 얇은 선이나 작은 공간들에 잉크가 덩어리져서 끼면 의도한 선의 느낌이 살지 않기 때문이다.


두개의 습작을 하고 나니 아직 판화 테크닉은 당연히 턱없이 부족하지만 모사가 아닌 내가 그려낸 도안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땅히 따라 만들고 싶은 그림을 찾지 못했고 망치더라도 내가 직접 구성한 이미지로 판화를 파보고 싶었다.


다른 판화 작품을 보고 따라 만드는 것은 소재를 어떻게 적절히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이미 나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밑그림만 잘 본 따서 그릴 수만 있다면 판화를 완성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데 (정교함을 떠나), 스스로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 도안을 그려보는 연습이 중요하다.


그래서 조금 난이도가 있더라도 평소에 그리고 싶었던 사진을 가져와 프로크리에이트로 스케치 작업을 했다. 배경을 검정색으로 할지, 흰색으로 할지에 대한 고민부터, 선의 두께와, 사물의 디테일 복잡성 수준 등 여러 의사결정을 하며 완성된 판화 형태를 상상하며 밑그림을 조금씩 완성했다.



프로크리에이트로 그린 완성된 스케치는 꽤 그럴듯해서 판화로 이렇게만 나와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생각은 트레이싱 페이퍼에 스케치를 옮기고 리놀륨판에 전사하고 다시 그 위에 펜으로 그려주는 반복 작업을 하며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레이하운드의 털의 결들을 어떻게 파낼 것인지, 감은 눈의 표현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물리적으로 파낼 수 있는 수준으로 그려야하기 때문에 완벽한 스케치를 완성하기가 애매했다. 애초에 판화로는 저런 수준의 디테일을 그려내려면 좀 더 숙련도가 필요하거나 디테일이 없어도 그림이 멋있을 수 있는 구성과 선들의 강약 밸런스를 찾아야 했다. 그레이하운드의 털 뿐만 아니라 꽃도 굉장히 어려웠다.


욕심 같아선 원본 사진처럼 풍성하게 피어난 꽃의 꽃잎과 곧게 뻗은 줄기들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세밀하게 파낼 자신이 없어 최종 스케치에서는 디테일들을 과감하게 줄였다. 하지만 어떤 부분을 남길지, 어떤 부분을 제거해야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지우개가루가 수북한 것을 보면 얼마나 여러번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했는지 알 수 있다. 다행히 트레이싱지가 충분히 견고해서 스케치에 구멍이 나는 것은 면했다.


스케치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 빨리 파는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다. 사실 이 스케치는 선들이 너무 지저분해서 파는 단계에서 의사결정을 해야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파기 전에 스케치가 확실히 나와주는 것이 훨씬 나은 듯하다. 이미 파기 시작했는데 선이 분명하지 않아 잘못 파내면 나중에 찍어냈을 때 어떻게 나올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으로 파내기 시작해서 꽃 줄기 중간 중간도 싹둑 깎여서 공중에 떠다니게 되었다 ㅠ..


그래도 그냥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꽃잎들을 파긴 했지만 선의 두께나 형태등이 맘에 들지는 않았다. 꽃의 형태가 얼핏 보면 단순 한 것 같지만 꽃잎의 곡선들과 미세한 크기 등을 놓치면 굉장히 어색하고 투박하며 인공적인 꽃이 된다.


사물을 보고 그림으로 추상화 작업을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는 걸 판화를 하며 체감했다. 단순하게 그릴 대상 수를 줄이고 선을 덜 쓴다고 자연스럽게 추상이 되는게 아니라 내가 표현하고 싶은 느낌, 감정,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는 선이나 면의 형태를 깊게 고민해서 본질만 남게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은 배우는 과정이니 당연히 멋진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욕이니, 판화의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하고 완성하는 것에 집중했다. 초반에 뭔가 배우고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완벽보다는 어찌됬건 완성을 추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세번째 판화 작품을 만드는데엔 스케치부터 찍어내는데까지 대충 열흘 정도 걸린 것 같다. 매일 퇴근 후 자기 전 두어시간 정도 리놀륨판을 깎아냈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과물이 확실치도 않은 작업에 이렇게 끈기 있게 몰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빨리 끝내고 싶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결과에 대한 기대를 내려 놓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일 조금씩 천천히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 보다는 판화를 해보는 과정과 경험 자체에 집중하니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완성된 모습!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림에 대해 스스로 많이 배울 수도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판화가 작업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그림의 전체적 구성을 생각하게 해주는 훈련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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