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 아버지가 한지를 사 왔다. 아버지는 한지를 마루에 펼쳐놓고 공책 크기만 하게 잘랐다. 가지런하게 맞춘 다음, 칸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천자문 책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벼루에 물을 붓고 내게 먹을 쥐여주었다. 먹은 한 손에 쥐기에 너무 컸다. 아버지가 궤짝에서 붓을 서너 개 꺼내며 말했다.
“먹물이 진해질 때까지 먹을 갈아야 한다.”
나는 벼루 옆에 바짝 앉아 두 손으로 먹을 잡았다. 팔을 움직이면서 먹을 갈았다. 시간이 갈수록 쪼그린 다리가 저리고, 팔이 아팠다.
“아버지, 언제까지 먹을 갈아요?”
아버지는 붓에 먹물을 묻혀 한자(漢字) 한 글자를 썼다. 그만해도 된다는 말에 먹을 바로 내려놓았다.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섰다.
“안 된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천자문 책을 만들 거다. 니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붓으로 한자를 쓸 때, 한지가 움직이지 않도록 귀퉁이를 잡으라고 했다. 오빠들을 따라서 눈깜 땡감 외워대던 한자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며칠째 안방에서 먹을 갈았다. 아버지는 매일 한지에 한자(漢字)를 썼다. 바깥바람을 쐬지 못해 몸이 배배 꼬였다. 한지 귀퉁이를 잡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버지가 언성을 높였다.
“야야, 해찰하면 안 돼. 똑바로 잡아야지.”
나는 아버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오늘만 놀다 와도 돼요? 내일은 잘 잡아줄게요.”
아버지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야가 아버지를 상대로 흥정하네! 정 그리 답답하면 나갔다가 오너라.”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같이 놀 애들을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우리 집 백구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천자문을 쓰는 데 스무날이 걸렸다. 천자문 책을 다 만든 줄 알았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나왔다. 애들이 대문에서 나를 불렀다.
“육일아, 육일아!”
얼른 방문을 열었다.
“어디 가? 아직 안 끝났는디.”
뭐가 안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애들하고 놀고 싶은데 못 나가게 하니까 눈물이 나왔다. 입이 댓 발이 나온 채 방바닥만 바라봤다. 눈물이 말랐을 때, 한지 사이 사이로 글자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소리로 꾹꾹 눌러가며 말했다.
“日(날 일). 月(달 월). 木(나무 목). 田(밭 전).”
“어이구! 내 강아지, 잘하네.”
아버지는 궤짝에서 사탕을 꺼내주었다. 나는 사탕을 입에 넣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인자부터 할 일은 한지에 들기름을 바르는 거다. 천자문 책을 오래가게 만들어야지!”
오후 내내 아버지와 둘이 천자문을 쓴 한지에 들기름을 발랐다. 고소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마지막 단계, 책 매기다.”
아버지가 무명실을 꼬면서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내 귀가 쫑긋했다. 아버지는 들기름 먹인 천자문 한지를 나란히 정리했다. 책등에 구멍을 다섯 개 뚫고, 무명실로 책 표지의 왼쪽 끝부분을 꿰매었다.
“잘 봐 둬라. 오침안정법이다. 이 담에 책을 맬 때…⋯”
나는 아버지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아버지, 밖에 나가서 놀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