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다. 아버지는 방에, 나는 마루에 앉아있었다. 어떤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더니 인사를 하면서 마루까지 올라왔다. 내게 몇 학년이냐고 물었다. 나는 2학년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 앞에 펼쳤다. 초등 2학년 학습지다. 나는 그 문제지를 보는 순간 낯선 이의 경계심이 싹 사라졌다. 바짝 다가가 문제지를 넘기며 진도에 맞는 문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낯선 여자가 방 안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아버님, 학생이 공부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다. 그걸 알지 못하는 여자는 계속 아버지에게 학습지를 설명했다. 올백으로 넘긴 흰머리, 하얀 턱수염과 콧수염을 한 아버지는 양손을 방석 밑에 넣고 몸을 양쪽으로 흔들었다. ‘청산’ 시조를 읊조리며 아버지만의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니 낯선 여자의 말이 들릴 리가 없다.
내가 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학습지에 대해 말했다. 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나는 학습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학습지가 오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으니까 훨씬 좋을 것 같았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낯선 여자가 말했다.
“학생, 아버지 도장 있어?”
“예, 있어요. 저기 서랍에.”
“그럼, 학생이 아버지 도장을 가져와 여기 찍으면 돼.”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도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도장을 건넸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문제지가 올 거야. 맘껏 공부해. 알겠지?”
“네!”
그 여자는 우리 집 주소를 적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얼마 후 학습지가 도착했다. 나는 신나서 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공부할 수 있는 문제지가 있으니 나는야 좋아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일주일이 지난 후, 아버지가 못 보던 문제지를 발견했다. 뭐냐고 묻길래 그 낯선 여자에게 주문한 문제지라 했다. 아버지는 그 문제지를 돌려주라고 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아버지의 말이다. 나머지 문제를 봉투에 담아 반품처리를 했다. 그런데 학습지 값을 내라는 지로가 왔다. 아버지는 학습지 값을 안 내겠다고 했다. 미성년자를 이용한 것은 불법이라고. 어느 날부터 법원에서 빨간 글씨가 써진 문서가 날아왔다. 나는 겁이 나고 무서웠다. 빨간 글씨가 써진 문서를 우체부가 놓고 갈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를 잡아가서 감옥에 가둘지도 모른다. 학습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뒷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았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끙끙 앓았다.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도장은 아주 중요한 거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걱정하지 말고 밥 먹어라.”
아버지 도장을 몰래 사용해서 죽도록 혼날 줄 알았다. 이후로 빨간 글씨 문서는 집에 오지 않았다. 그제야 나도 마음 편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신나게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