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문신남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자라던 자식이었다. 초중고 시절에는 반장을 놓치지 않았고, 운동과 공부 모두 곧잘 했었다. 일탈이라고 해봤자 리니지에 빠져 피시방에 살다시피 했다는 정도랄까. 이후 재수를 하긴 했지만 적당히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소위 안정적이라고 일컫는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이른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으면 부모님의 생애 미션은 모두 완료되는 듯 보였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서른까지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부모님이 뒷목을 잡게 만든 세 번의 이벤트가 발생했으니 그중 하나가 타투였다. 부모님이 아직도 문신이라고 부르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을 몸 한구석에 새기고 싶었다. 세월이 흐르며 외적인 모습과 건강 상태, 마음가짐 등 많은 것들이 변하겠지만 변치 않는 무언가가 곁에 있으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떤 것을 어디에 새겨야 할까.
예상보다 만만치 않은 고민이었다. 기본적으로 쉽게 지울 수 없는 특징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했다. 덕분에 현재까지 삶의 중심이 됐던 원칙이나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봤다.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계기가 타투일 줄이야...!)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것들이 별로 없었다. 좌우명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나이를 먹으며 수 차례 변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이후에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가 인생의 격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 단어들이 지극히 유치하게 느껴진다. 만약 지금 당장 꽂히는 문장이 있더라도 몇 년 뒤에는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으로 새기는 타투인 레터링을 포기했다.
다음 후보로는 모양이 있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이미지를 살펴보니 별, 하트는 기본이고 다양한 동식물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양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 중에서 고르는 프로세스는 본말전도에 가까웠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아스날이었다.
잉글랜드 축구팀인 아스날에 대해 애증에 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잘할 때는 기쁘지만, 못할 때는 답답하고 때로는 열 받기도 한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 이어져 후자인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아스날은 한국 야구의 엘지 같은 느낌이라고. (그래서 야구팀 중에서도 엘지에 유독 애정이 간다) 어쨌든, 현재는 애증의 관계가 됐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스포츠팀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영국 작가이자 아스날 팬인 닉 혼비는 팀 응원을 결혼으로 비유하며 축구팬에게 이혼은 가능하지만 재혼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했다. 싫으면 경기를 안 보면 되지, 잘 나가는 라이벌 팀을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스날을 한 번 좋아하게 된 이상 앞으로 이 팀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빠져나갈 수 없게 됐다. 그렇다. 내 몸에는 (어쩔 수 없이) 아스날이 새겨져야 했다.
이 정도면 꽤 진전이 된 것 같은데, 방향을 정하고 나서도 고민은 여전했다. 다시 레터링으로 돌아왔다. 팀의 슬로건인 ‘Victory through Harmony’, 라틴어 버전인 ‘Victoria Concordia Crescit’, 팬을 지칭하는 ‘Gooner’ 등 선택지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종 결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팀의 문양인 대포가 됐다. 대포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의미부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누군가 특기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의미부여 입니다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다)
현재 내가 하는 일은 손의 역할이 중요하다. 손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술맛이 달라지고, 어떤 글씨를 쓰고 타이핑을 하느냐에 따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결정된다. 대포는 아스날의 문양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신호를 쏘아 올리는 역할을 한다.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손을 통해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에 새긴다면 의미부여가 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볼 수 있으므로 일에 대한 마음가짐도 틈틈이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타투를 하는 날은 몇 년 전 라식 수술을 받았던 날처럼 기대반 두려움 반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일뿐만 아니라 통증이 꽤나 크다는 후기도 종종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예약했던 타투이스트의 작업실은 홍대 근방이었는데, 건물 지하에 들어가 문을 열어보니 노란 조명 아래에 시술대가 있었다. 쭈뼛쭈뼛 거리며 위로 올라가 누워있으니 (역시나 온몸에 타투가 가득한) 타투이스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조금 더 따끔할 수 있고요, 그렇다고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손에 식은땀이 났지만 바로 시술을 받기 시작했다. 타투를 하기로 한 위치는 왼쪽 손등의 엄지와 검지 사이였는데, 이내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늘로 쿡쿡 찌르는듯한 통각이 느껴졌다.
어라...?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평상시에 체하면 스스로 바늘을 이용해서 손을 따곤 했는데, 그 정도의 아픔보다 덜했다. 아마도 그나마 거친 피부라고 볼 수 있는 손등이고 그중에서도 뼈와 덜 닿는 부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누워 손을 옆으로 내민 채 받았는데, 그 와중에 슬금슬금 졸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드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타투를 하는 와중에 잠이 오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려와 달리 무난하게 시술을 완료할 수 있었다. 사후 관리도 어렵지 않았다. 바셀린을 사서 일주일 동안 하루에 두어 차례 얇게 도포하면 끝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대포 문양을 인쇄해서 가져갔는데, 정말 그대로 새겨졌다. 주위 사람들도 마음에 들었는지 칭찬 일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관문이 남았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리지? 군대에서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식사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왕 들키는 김에 당당하게 들키자고 마음먹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함께 식사를 했다.
“너 손에 뭐니? 도장 찍었니?” 밥을 떠먹던 어머니가 왼손을 붙잡으며 말씀하셨다.
“아, 이거… 나… 타투한 거야.”
“타투? 타투가 뭔데? 문신은 아니지?”
“응, 이건 타투지. 문신은 아니야. (궤변 중)”
(시술한 부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어쨌든 이거 지워지는 거지?”
“아니…! 엄마 미안해, 너무 하고 싶어서 했어...!”
그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잠시 뒷목을 잡으셨고 동시에 한숨을 쉬셨다. '이 녀석이 바를 운영하더니, 문신까지 다 하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요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신다. 마치 없는 것처럼.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고 용서받을 수 있다. 내가 용 몇 마리를 등에 새긴 것도 아니고.
요즘 내 눈에 띄는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에어팟을 끼고 다니는 사람, 하나는 타투를 한 사람이다. 둘 다 내가 하고 다니는 것들인데, 아무래도 소수여서 동지 같은 마음에 더 눈길이 가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타투한 사람들은 나처럼 등짝 좀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눈길에 애정 한 스푼이 더해진다.
* 추후에 문의해보니, 고통의 정도는 부위보다 크기와 상관관계가 높다고 한다. 고로 원하는 타투의 크기가 크지 않다면 부위에 대한 두려움은 덜어도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