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by 가와카미 미에코,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스스로의 소회가 담긴 글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면, 이 책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비춰진 하루키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인터뷰어인 가와카미 미에코가 어찌나 많은 준비를 했던지, 대화 도중에 다소 당황한 듯 보이는 하루키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 하다>에서 그가 뛰어난 배경 지식으로 평생 음악을 해온 오자와 세이지를 당황케 했던 모습이 연상되어 더 흥미로웠음) 기억에 담아두고 싶은 대화가 많아 부지런히 옮겨 적었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
비유란 의미성을 부각하기 위한 낙차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낙차의 폭을 혼자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설정하고 나면, 여기에 이게 있으니 여기서부터 낙차를 역산하면 대략 이쯤이다 하는 걸 눈대중으로 알 수 있어요. 역산하는 게 요령입니다. 여기서 쿵하고 적절한 낙차를 두면 독자는 눈이 확 뜨이겠지, 하는 식으로요. 독자를 졸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슬슬 깨워야겠다 싶을 때 적당한 비유를 가져오는 거죠. 문장에는 그런 서프라이즈가 필요해요. (p.25)
작가가 점점 3인칭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는 건 이야기가 진화해서 복합화, 중층화하는 과정의 숙명과도 같습니다. (p.30)
초고를 쓸 때는 다소 거칠더라도 어쨌건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순조롭게 올라타서 계속 전진하는 거죠. 눈앞에 나타난 것을 가장자리부터 붙들고 써나가요. 물론 그러기만 해서는 이야기 여기저기 모순이 생기지만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중에 조정하면 되니까. 중요한 건 자발성. 자발성만은 기술로 보충할 수 없어요. (p.48)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역시 자신밖에 만들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느정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이렇게 하는 게 옳으니까 이래야 한다는 발상은 좀 아니지 않나 싶어요. (p.66)
가와카미: 무라카미 씨는 소설 쓰기를 설명할 때 종종 집 한 채에 비유하시는데요. 1층은 가족 모두 모이는 단란한 장소로, 즐겁고 사회적이며 공통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자기 책 같은 게 꽂힌, 좀더 개인적인 방이 있고요.
무라카미: 네, 2층은 개인 공간이죠.
가와카미: 이 집에는 지하 1층에도 좀 음침한 방이 있는데, 그래도 그 정도는 누구든 비교적 쉽게 내려갈 수 있어요. 일명 일본의 사소설이 다루는 것이 아마 이 언저리, 지하 1층에서 일어나는 일이겠고요. 근대적 자아 같은 것도 지하 1층의 이야기. 그런데 통로가 더 밑으로 이어지고, 지하 2층이 있는 게 아닐까. 그곳이 아마 무라카미 씨가 소설 속에서 늘 가고자 하는, 가고 싶은 장소가 아닐까 하는 거죠. (p.97)
저는 이래저래 벌써 사십 년 가까이 프로로 소설을 써왔는데, 그래서 그동안 무얼 했는가 하면 문체를 만드는 것, 그게 거의 다예요.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좋은 문장을 쓰는 것, 나의 문체를 보다 탄탄하게 만드는 것, 보통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p.127)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p.197)
아무튼 독자가 간단히 읽고 넘어갈 문장을 쓰면 안 된다는 거죠.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문장으로만 채울 필요는 없지만, 몇 페이지에 하나쯤은 넣어줘야 해요. 아니면 독자가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아요.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