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고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성 Oct 15. 2018

밴쿠버, 2박 3일이면 충분히 사랑에 빠질만한

어릴 적에 친구들과 수도 이름 맞추기 게임을 종종 했었다. 상대방이 나라 이름을 이야기하면 그 나라의 수도 이름을 대답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승부 근성이 은근 있었던 나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필살기가 몇몇 있었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호주와 캐나다였다. 호주를 이야기하면 8할이 시드니라고 대답했고, 캐나다를 던지면 몬트리올과 함께 등장하는 단골 오답이 바로 밴쿠버였다. (물론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미국만 이야기해도 뉴욕이라 대답한다. 부루마블의 영향이 이렇게 크다.) 


밴쿠버는 오로라의 도시 옐로 나이프에 가기 위한 관문이었다. 옐로 나이프는 캐나다의 북서부에 있는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와 캘거리를 거쳐 가야만 했다. 즉, 밴쿠버는 여행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에 가까운 셈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도 않았다. 표면적인 일정은 이박 삼일이지만 꽉 채워보면 하루 반나절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행을 할 때 최고의 교통수단은 두 다리와 자전거다. 여행에서 얻는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우연히 마주치는 이벤트인데, 아무래도 버스와 지하철보다는 속도가 느리기도 하고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밴쿠버는 걷기에도 좋지만, 꼭 자전거를 타야만 한다. 자전거의 도시다.  


서울에 공유 자전거 서비스 따릉이가 있듯이, 밴쿠버에는 모비 바이크가 있다. 약 8달러(한화로 약 7천 원)를 내면 24시간 무료이며, 대신 30분마다 도시 곳곳에 있는 정류소에 반납해야 한다. A 정류소에 빌린 자전거를 B 정류소에 반납하면 다시 그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즉, 30분마다 반납만 잘하면 맥주 한 잔 가격으로 하루 종일 밴쿠버를 다닐 수 있다는 소리다. 성능도 좋다. 기어 조절이 무려 7단까지 가능하다. 따릉이는 3단까지 가능하다. 


밴쿠버에는 스탠리 파크라는 도심만 한 크기의 공원이 있다.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바다가 감싸고 있는 멋진 공원이다. 사실 자전거를 빌리게 된 이유도 스탠리 파크를 돌아다니기 위한 목적이 컸다. 다운타운에서 스탠리 파크까지 가는 길은 내리막으로 이어지는데, 시원한 맞바람을 맞으며 쓱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너무나도 멋진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아, 외마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쭉 뻗은 나무 사이로 곧게 펼쳐진 길이 이어지며, 한쪽 나무 뒤편에는 고요한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마치 휴머니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는 듯한 풍경이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족히 500년은 된 듯한 나무들이 가득한데, 떨어진 단풍 잎사귀를 들어보니 얼굴보다 큰 것도 있었다. 과연 단풍국이라 불릴 만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보통 공원과는 달리 스탠리 파크는 일방통행으로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방향을 지정한다. 덕분에 한 번 들어가면 최소 삼십 분 이상은 달릴 수밖에 없다. 공원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코스 중 가운데 숲길로 들어가서 좌측 해안을 따라 나오는 방향을 선택했다. 절경으로 유명한 써드 비치를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코스를 따르면, 단지 공원에 갔을 뿐인데 하늘까지 채우는 빽빽한 숲을 만났다가 어느새 수평선을 발견하게 되며 고개를 조금만 돌려 먼 곳을 응시하면 바다 건너 작은 집으로 옹기종기 채워진 마을도 볼 수 있다. 날씨까지 좋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써드 비치에는 벤치가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그냥 벤치가 아니라 기부를 받아 만들어진 듯한 벤치이다. 상단에는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과 메시지가 적혀있는데, 때로는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메시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특히 한 메시지에는 눈길과 마음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20년 이상 혼자 써드 비치에 왔던 부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We certainly did


정신없이 페달링을 하다 보니 지쳤는지 벤치에 누워 잠을 청했다. 족히 삼십 분은 잔 것 같다. 평온하고 평안한 시간이었다. 써드 비치를 따라 스탠리 파크 입구로 돌아오는 길은 나무와 바다가 감싸고 있다. 처음에는 미역 냄새가 났다가 풀 냄새로 바뀌었다. 스탠리 파크에서 다운 타운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기 때문에 동쪽의 해안 도로를 따라 개스 타운까지 내려간 뒤 다운 타운으로 우회해서 가는 것이 편한 방법이다. 돌아오는 길은 스탠리 파크와 풍경이 사뭇 달랐다. 스탠리 파크에 해변이 있었다면,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항구가 있었다. 타이타닉을 방불케 하는 크기의 유람선뿐만 아니라 작은 요트들과 수상비행기도 있어 눈이 심심하지 않았다. 개스 타운까지 내려가는 동안 자전거 도로는 끊기지 않았다. 모든 길은 이어졌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미소를 건넸다. 2박 3일 동안의 밴쿠버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두 가지는 자전거와 미소였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통과 조금 다른 삶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