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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성 Apr 06. 2018

익명의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

쓰기의 말들 (by 은유)


책바를 운영하다보니 책 선물을 많이 받는 편이다. 출판사에서 홍보의 목적으로 보내주는 것이 가장 많고, 지인이나 손님에게 간간이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예측 불가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정체불명의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상자가 아닌 봉투에 담긴 것으로 봐서는 종이로 된 것이 분명했다.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뜯었는데, 녹색으로 된 책 하나가 달랑 들어있었다. 편지 또는 책 앞 부분에 쓰였을 만한 인삿말이 없었고, 발신인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주소가 쓰여있었다. 익숙한 것이라곤 수신인에 적혀있는 책바라는 이름과 주소였다. 스케쥴도 많았을 때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 책도 판매 하시나요?”


어떤 남자 손님이 계산을 위해 기다리다가 책장에 있던 한 책을 꺼내들며 물었다. 녹색 책이었다. 책바에서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책을 판매한다. 도매서점에서 구매한 새 책과 기존에 소유하고 있는 중고 책이다. 중고 책은 대부분 판매하지만 저자가 기증 했거나 선물 받은 책은 (손님이 너무 간절하게 원했을 경우는 솔직히 고민 된다) 가능한 책바에 오랫동안 두려고 한다. 책을 보는 순간, 처음에는 “네. 판매합니다.” 라고 했다가 바로 “아니요. 이 책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죄송해요.”라고 말씀드렸다. 누군가에게 받았는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어쨌든 선물 받은 것 이기에 찰나의 순간 선택의 경계에 서있던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냥 두고 싶었다. 그러다가 마음 먹었다. 일단 읽자.


녹색 책의 정체는 은유 작가가 쓴 <쓰기의 말들>이었다. 책의 구성은 단순한데, 제목 그대로 '쓰기에 관련된 문장'과 함께 작가의 에피소드가 담겼다. 글쓰기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내공이 담긴 글이라 짧은 분량에도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곁에 두고 싶은 문장이 많아 남기지 않고 기록해뒀다.


*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뒹굴더라도 연꽃 같은 언어를 피워 올린다면 삶의 풍경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p.23)
*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 나탈리 골드버그 - (p.88)
* 누군가 글쓰기가 막막하다고 하소연하면 난 자료부터 찾으라고 한다. 감각적 글발보다 탄탄한 자료가 글쓰기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자료가 글쓰기를 자유롭게 한다. (p.91)
* 공부는 독서의 양 늘리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맥락 만들기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마주한 자기 한계들, 남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얻은 생각들, 세상은 어떤 것이고 사람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수정해 가며 다진 인식들. 그러한 자기 삶의 맥락이 있을 때 글쓰기로서의 공부가 는다. (p.109)
* 그림이란 실제적 장소를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그곳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제공하는 윤곽과 인상을 조합해 내는 것이다. - 에드워드 호퍼 - (p.112)
* ‘설명하지 말고 보여 줘라’는 내러티브 제1원칙으로 꼽힌다. 짧은 산문 형식의 글은 대개 내러티브 에세이로, 몇 가지 사건을 엮은 글이다. 독자를 어떤 상황으로 데려가서 생생히 보여 주는 글을 쓰려고 나는 노력하고 학인들에게도 주문한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세요. (p.113)
* 때로 십 년 세월을 한 줄 문장으로 압축하고 때로 일 분 동안 감정의 요동을 한 페이지에 담을 수도 있다. 굵기가 다른 여러 개의 붓을 쓰는 화가처럼, 과감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기. (p.113)
* 크게는 두가지 질문을 오가면서 읽는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가’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잘 전달되었는가.’ (p.193)
* 에세이의 결정적 기술은 글쓴이가 자기 노출을 절묘하게 통제하는 데 있다. - 웬디 레서 - (p.198)
* 이는 자기 경험을 주재료로 삼는 글쓰기에도 적용된다. 개인적 경험을 끌어올 때는 그 자기 노출에 보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내 글에도 아이가 등장한다. 지인과의 술자리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사례가 꼭 필요한가 점검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과시인가 소통인가.’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가 글쓰기 전에 묻는다는 그 물음을 나도 던져 본다. (p.199)


이렇게 많이 적게 된 이유는 별다름 없다. 글 쓰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는 사람으로서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둘 메시지 들이다. 작년부터 유난히 글쓰기에 대한 책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책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재미있는데, 글쓰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은유 작가의 글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글에서 프로의 향기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일단 써라.


덧. 책을 선물해주신 익명의 어떤 분께 늦게나마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덕분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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