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추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석은 가족의 시간이다. 그러나 은퇴한 지금의 나에게는 편안한 휴식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저 휴대폰에 추석 인사 이모티콘을 하나 다운로드하여 저장해 두면, 왠지 명절 준비가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젊은 시절의 나의 추석은, 결혼해서 아이를 기르며 일을 하던 다른 여성들처럼 늘 분주했다. 음식 재료와 과일, 크고 작은 선물과 봉투까지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이 예산으로 다들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명절을 맞이하곤 했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번에는 뭘 하면서 즐겁게 보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는 시댁의 큰 며느리였다.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시동생 네 명과 그들의 배우자들, 시누이와 남편까지 합치면 어른들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여기에 자녀들까지 모이면 20명이 훌쩍 넘으니, 어머니 댁 부엌과 거실은 늘 분주하고 북적였다.
다행히 제사를 지내지 않고 기독교식 추모예배만 드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끼의 식사를 책임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서들이 흔쾌히 일을 분담하여, 각자 집에서 마련해 오는 방식으로 명절 준비를 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며느리라는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이들이 집 안을 뛰어다니고, 부엌에서는 발걸음이 뒤엉키며, 손님이 올 때마다 음식이 오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활기찬 명절이었겠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크게 느껴지는 노동의 시간이었다. 추석 전날부터 당일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집안의 여성들은 대부분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친정에 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명절날 친정에 가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든 좋은 시간을 보내면 되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명절마다 친정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운함을 넘어 서러움으로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 친정의 추석은, 결혼 전 어머니가 해 주시던 나물과 고기전, 송편을 먹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명절이다. 추석 문화에서 친정은 시댁과는 달랐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5명의 형제자매 중 2-3명은 외국이나 지방에 흩어져 살다 보니 명절마다 온 가족이 모이기는 어려웠다. 나는 시댁에 있어야 했으니 명절에 친정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제사도 예배도 없이, 그저 모인 식구들이 간단히 음식을 해 먹는 정도였다고 한다.
큰 올케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언제나 설거지를 도맡으셨고, 명절 아침 식사가 끝나면 “자, 이제 우리도 좀 쉬자. 어서 돌아가거라” 하시며 먼저 챙겨 보내시곤 했다. 명절의 부담을 줄여 주신 점이 늘 고마웠다고 한다.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는 큰 올케가 추석이나 설, 추모일에 상을 차려 부모님 영정 앞에 먼저 올린 뒤 자신의 가족과 함께 식사한다.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겠다고 말한다.
부모님의 유골함이 있는 서울 근교 추모공원은 잘 가꿔진 꽃동산 같다. 요즈음에는 외국에 있는 자녀들까지 모이거나 새로운 식구가 생기면 대가족 나들이처럼 함께 방문하기도 한다. 나도 가끔 동참하지만 자주 가진 못한다. 이번에는 추석 전에 새로 큰 아들을 결혼시킨 큰 올케네 식구들과, 그동안 죽 지방에서 일하다가 은퇴하면서 서울로 다시 돌아온 여동생네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같이 간다고. 나도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내년으로 미루고 있다.
시댁 중심이던 내 추석이 크게 달라진 것은 일본에 살면서부터였다. 일본에는 추석이나 설 같은 음력 명절이 없으니 대학의 수업도 그대로 진행되었다. 자연히 명절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비용만 보탰다. 처음에는 “큰며느리가 빠져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있어서, 따로 전화도 걸고, 동서들의 수고를 생각해 식사비를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해졌다. 명절 후 전해오는 사진을 보면 예전보다 오히려 더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거제로 이사 온 지금도 그 방식은 이어지고 있다. 은퇴 후 명절은 의무의 날이 아니라 편안히 보내는 시간이 되어 간다. 시어머니도 연세가 드시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이젠 너희 둘만 생각하며 지내도 된다”라고 너그럽게 말씀하신다. 동서들도 사정이 있으면 모임을 쉬고, 단체방 안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분위기다. 예전 같으면 “그래도 얼굴은 보여야지” 하셨을 법한 말씀도 이젠 사라졌다. 모두가 나이를 먹으며, 명절 문화도 조금 더 합리적으로 바뀐 듯하다.
두 딸과 그들의 배우자는 한국에 살지 않는다. 그래서 명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오거나, 내가 가야 할 필요도 없다. 대신 각자 좋은 일정에 맞춰 만난다. 올해 9월에는 큰딸 내외가 다녀갔고, 10월 중순에는 작은딸이 혼자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명절마다 “아이들이 언제 내려오나” “손주들을 어떻게 챙기나” 하는 고민을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 있다. 가끔은 쓸쓸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자유롭다. 명절은 나와 남편이 함께 보내는 조용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텔레비전에서 귀성길 정체 소식을 들으며, “저 길 위에 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도 한다. 때로는 차를 몰고 거제 곳곳을 다니며 붐비는 식당과 관광지를 바라보기도 하는 데, 그 북적임조차 거제가 살아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오롯이 우리만의 명절이라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음식은 여전히 그립다. 다행히 거제에는 송편을 맛있게 빚는 떡집이 있다. 경상도식 나물과 국은 이웃이 나눠 주어 맛보기도 했다. 올해는 직접 하기보다 솜씨 좋은 식당에서 몇 가지를 사 먹어 볼까 한다. 명절 음식이 꼭 고생 끝에 만들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맛있게 먹고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추석이 햅쌀 송편과 나물, 과일과 술로 조상께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라면, 중국의 중추절(中秋節)은 달에게 제사를 지내고 월병(月餅)을 나누는 풍습이 중심이다. 일본의 오본(お盆)은 8월에 조상을 기리는 시기이지만, 한국처럼 며칠에 걸쳐 대규모로 음식을 준비하는 풍경은 드물다. 방식은 달라도, 명절이 가족과 공동체를 잇는 끈이라는 점은 같다.
추석을 앞두고 한국 사회의 풍경은 늘 비슷하다. 고속도로 정체 예상, 오르는 명절 물가와 선물세트 가격이 뉴스에 오른다. 막상 추석이 되면 귀성길 사고 소식이나 ‘명절 증후군’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귀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피로와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명절인 것은 여전하다고 보인다.
올해는 우리 세대(시부모·부모·조부모)가 예전의 서운함과 어려움을 떠올리며 과감히 바꿔 보면 어떨까.
며느리나 딸이 음식을 하면 미리 재료를 준비해 두고, 설거지는 아버지가 맡고, 선물을 받으면 그 이상으로 돌려보내 보자.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눈빛과 말로 표현해 보자. 오면 좋고 안 오면 더 좋고 하는 마음으로 명절을 좀 편히 생각해 보자.
나의 친정아버지는 큰 선물 한 번 하지 않으셨지만, 언제나 설거지를 도맡아 하고 명절날 서둘러 챙겨 보내는 모습으로 큰 며느리에게 인기 만점 시아버지가 되셨다. 어머니는 그 옆에서 그저 웃으시며 큰 며느리 얼굴을 바라보며 “니는 우째 이렇게 못하는 게 없노” 하시곤 했다고. 그 일화 덕분인지 돌아가신 지금도, 의무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큰 며느리와 손자들이 준비한 맛있는 음식상을 매년 받으시는 듯하다.
한 끼는 집에서, 한 끼는 평소 못 가던 외식으로 대접해 보는 것도 좋다. 내 경험으로는 먹는 선물보다 작아도 품질 좋은 개인 선물이 반응이 좋았다. 며느리나 딸에게는 최신 컬러의 립스틱, 사위나 아들에게는 남성 화장품이나 선글라스가 의외로 호응이 컸다. 아마 오지 말라 해도 자꾸 오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올해와 내년의 전략을 조금 달리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집 숙박 대신 근처 호텔을 미리 예약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명절은 뭐니 뭐니 해도 가족의 시간이다. 그러나 은퇴한 지금, 나와 남편에게 추석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고, 부담이 아니라 여유다. 올해도 보름달을 바라보며 ‘이제는 이렇게 한가로워도 된다’는 안도감을 다시 한번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