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한 낮보다 밤이 좋다. 나를 드러내거나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겠지. 고요하고 적막한 그 시간에 혼자서 영화를 보고 유튜브를 본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잠이나 일찍 자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이 백번 옳지만 나는 동안 피부와 꿀잠을 포기하고 이 시간을 홀로 만끽한다. 꿈같은 이 순간이 무심히 흘러가 버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땅바닥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붙잡으면서도 주기적으로 꼭 챙겨보는 영상이 있다. 바로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 대회 영상이다. 국뽕에 너무 취한 것 아니냐. 지금 1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그 영상들을 보냐. 누군가는 나를 올드하다거나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저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김연아 선수의 '2010 밴쿠버 올림픽' 프로그램들은 정말 완벽 그 자체였다. 쇼츠와 프리에서 보여준 그 우아함과 유연함, 열정적인 에너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당당하고 여유 있게 금메달을 걸고 손을 흔드는 모습은 피겨 여왕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녀의 모습은 성공한 사람의 전형이었다.
처음에는 금메달을 목에 건 대회 영상들을 많이 보았다. 어쩜 저렇게 아름답고 편안하게 움직일까. 점프를 높고 멀리 뛰는데 어떻게 실수를 한 개도 안 할 수 있을까. 저 어린 소녀가 이토록 강단 있는 이유가 뭘까. 강심장 김연아를 볼 때마다 국뽕이 차올랐다. 이 소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서 눈물도 찔끔 흘렸다.
그러다가 알고리즘의 안내를 받아 많이 공개되지 않은 영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쉴 새 없이 얼음 바닥으로 내동댕쳐져 엉덩방아를 찍
찧는 모습,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겨우 일어나 다시 점프에 도전하는 모습, 무대에 등장하기 전 뒤편에서 다른 선수들의 프로그램 음악을 들으며 동작을 연습하는 모습 등이다. 우리는 김연아 선수가 워낙 시크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독종이라거나 승부욕이 정말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성공할 수밖에 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그녀는 피겨에 최적화된 아름다운 신체 조건을 타고났고 재능도 천재적이다. 그러나 그런 선수가 김연아뿐이겠는가. 피겨의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온 김연아를 살갑게 대해주는 유럽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1등을 해도 주인공으로 대우해 주기보다 자기들끼리 뭉쳐서 친분을 과시하고 은근히 그녀를 따돌리는 영상들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다 보니 일본의 아사다마오를 항상 라이벌로 등장시켜 싸움을 붙이려는 언론과는 달리 김연아 스스로는 일본 선수가 마음이 더 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피겨 하는 자신과의 싸움뿐 아니라 라이벌 선수들, 언론, 악플러들과도 꾸준히 싸워 나가야 했다. 작은 소녀였을 때부터 받았던 멸시와 조롱을 묵묵히 견뎌냈고 편파적인 판정에도 분노하기보다 다시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애매모호하지 않은 확실한 실력을 갖춰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를 보면 확실히 타고난 천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재라고 해서 항상 모든 상황이 그녀 중심으로 돌아가거나 그녀에게만 행운을 안겨주지 않는다. 변수는 늘 있고 그 변수를 뚫어야 나에게 행운의 기회가 온다. 연습 때는 잘하다가 실전에서는 실력 발휘를 못하는 어느 선수와 달리 연습 때 제대로 점프를 성공시키지 못해 불안한 마음이 있지만 실전에서 깔끔하게 성공시켜 모든 의심을 날려버리는 그녀의 무기는 바로 연습이다. 연습으로 단련된 몸이 그 순간에 실력 발휘를 하는 것이다.
밴쿠버 올림픽에서의 김연아는 누구보다 빛나고 멋있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장면은 '2014년 소치올림픽' 은퇴 무대에서 쇼츠를 마치고 보여주었던 미소였다. 아무리 김연아라고 해도 은퇴를 번복하며 짧은 연습 기간을 거쳐 선보인 무대에서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실수 없이 스케이팅을 마쳤을 때 야무지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었을 테지만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를 마친 그녀의 표정은 안도감에서 나온 편안한 미소였다. 좀처럼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지만 쇼츠 프로그램 시작 전 보였 주었던 긴장한 표정은 무척 생소한 모습이었다. 많이 떨었구나.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했구나.
금메달을 목표로 나온 선수라기보다 그저 이 무대를 무사히 마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는 신인 같은 소박한 바람이 엿보였다. 하늘거리는 노란 의상을 입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동작들은 쉬었다 나타난 선수의 모습 같지 않았고 전성기 때처럼 완벽했지만 응원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1등 해야 해. 금메달은 당연히 연아거야 라는 생각보다는 "수고했어. 그동안 애썼어 "라고 말하며 꼭 안아주고 싶었다.
서정적인 음률 탓에 눈물이 고인 거라 생각했지만 그간의 어려움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온 그녀가 너무나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깨에 피겨 꿈나무들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투정 없이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의 삶에 대한 찬사와 선수로서의 삶을 위해 평범한 일상들을 포기해 왔던 그 헌신에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녀가 바위 덩어리처럼 무거운 이 책임감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불공정한 판정으로 금메달을 거머쥔 소트니코바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었던 김연아의 품격. 그녀의 품격은 두고두고 나를 들여다보는 잣대가 되었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묵묵히 참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그녀의 발자국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 오늘도 김연아의 스케이팅 영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