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지 에세이 <제철행복> 중 “입춘”
연일 맹추위로 나라 전체가 얼어버릴 것 같다. 대한민국이 북극에 붙어있지 않나 지도를 들여다볼 지경이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 삼한사온의 법칙도 통하지 않는 겨울왕국이다. 그런데 이번 주에 잠깐 영상의 기온일 때가 있었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겨울이라고 매일 추운 건 반칙이지라고 생각할 즈음 혹시나 해서 달력을 들춰 보았다. 2월 4일 “입춘” 어머 입춘이래. 뭐야, 이렇게 매일 추운데 봄이 온다고? 그래서 며칠만 봄 예고편으로 반짝 따뜻했나 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미세한 날씨의 변화, 햇볕의 세기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우울하지 않고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년에 24절기가 있다고 하지만 달력을 꼼꼼히 체크하지 않으면 뭐가 뭔지 언제 절기가 왔다 갔는지 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현대인의 삶 속에서 절기란 그저 달력에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글자일 뿐이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작년에 김신지 작가의 <제철행복>을 만나기 전까지는. 24절기 명칭은 중국 주나라 때 화북 지방, 지금의 황하 유역의 기후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한반도의 기후와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래도 해의 따스함의 차이, 하늘과 구름의 변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서 절기라는 시스템을 발견해낸 그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입춘은 네 개의 입절기-입춘, 입하, 입추, 입동-중 계절의 시작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부터 당장 따뜻한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뭐든 새로 시작하려면 준비운동이 필요한 법! 이렇게 커다란 지구를 데우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미세한 변화가 느껴지긴 했다. 1월에 보았던 해와 입춘 즈음 보았던 해는 달랐다. 1월에는 오후 5시쯤 서서히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서 5시 반이면 깜깜했는데 이번 주부터는 6시까지 환했다가 점점 어두워졌다. 우주의 질서는 참으로 성실하다. 지구 안에서 아무리 야단법석 난리가 나도 제 할 일을 꼬박꼬박 잘 해낸다.
봄이 오는 소식은 코끝과 혀끝이 가장 먼저 느낀다. 마당이 꽁꽁 얼어서 아직 냉이나 달래를 찾기는 힘들다. 쑥도 안 보이고. 설이 지나야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마트에 가봐야지. 채소 코너엔 향긋한 봄나물들이 가득히 진열되어 있다. 오늘 저녁은 나물 비빔밥이다. 납작한 초록 모자처럼 생긴 봄동을 사다가 매콤달콤 무치고, 통통하고 넓적한 낙지 다리처럼 펼쳐진 시금치는 맛간장을 약간만 넣어서 달달하고 아삭한 뿌리의 맛을 살린다. 무를 채쳐서 볶아 무나물을 만들고 버섯도 볶고 콩나물도 무치면 봄나물 세트 완성이다. 여기에 두부를 넣은 냉이 된장국을 추가하면 풍성한 저녁 식탁이 된다. 다섯 식구가 앉아 각종 나물과 초장,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빈다. 어느 누구도 말이 없다. 숟가락과 그릇이 바쁘게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뿐. 그리고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봄의 맛을 음미한다. 냉이 된장국은 왜 이리 달달한 것인지. 고기가 없는 밥상도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있다니 봄나물은 진리다.
이번에 <제철행복>을 다시 펼치면서 올해의 입춘은 작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느꼈다. 작년 이맘때는 대한민국에 과연 봄이 올까 막막했었다. 계엄이 해지 되었다고는 하지만 윤석열은 여전히 파면되지 않았고 내란에 가담한 자들도 낱낱이 드러나기 전이라 나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작가는 입춘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절기라고 했지만 나는 불안했고 온전히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염원하던 민주주의를 되찾았고 정부도 바뀌어서 전보다 훨씬 나아질 거라는 설렘과 기대를 갖게 된다. 싱그럽고 계절의 향기 가득한 이 책에서 발견한 입춘의 희망이 반은 실현된 것 같다.
입춘에는 불운을 막고 행운을 불러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다양한 풍속들이 많다. 그중 입춘첩쓰기가 내 시선을 붙잡는다. 입춘첩은 새봄을 맞이해 집집마다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인 좋은 글귀나 시다. 한자로 쓰면 멋있겠지만 한문이 짧은 나는 한글로 써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 마음 판에 붙여야지.
“추웠지만 잘 참았어. 햇살은 항상 너를 비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