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때론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날'은 문득,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가는데, 마음은 헛헛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싶진 않은 날.
점점 더 싱숭생숭해져 딱 한 잔만 하면 좋겠는데, 술집에 홀로 앉아 있는 게 부담스럽거나 몸이 끈적끈적해 일단 얼른 씻고 싶거나 무엇보다, 돈이 좀 없는 날. 그날이 오면, 그 '혼술의 날'이 오면,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주 결정은 오로지 내가
집에 쟁여둔 술이 있다면 적당한 안주만 잘 맞춰 사도 좋다. 마트에서 싱싱한 재료들을 골라 나만의 안주를 만들 수도 있고, 귀찮으면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인스턴트 안주들 중 적당한 놈을 뽑아도 좋다. 혹은 우린 그런 민족이니까, 배달도 좋다. 요즘엔 아예 '1인 혼술 세트'를 배달해주는 곳도 늘어 자꾸만 손가락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비싼 메뉴를 클릭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그때그때 내 마음과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 월급날이면 비싼 메뉴를 배달! 힘이 쭉 빠져 술잔을 들 힘만 남아 있다면 편의점 음식! 적당한 의지와 에너지가 장착된 상태라면 직접 요리! 그중에서 나는 자취 경력 8년 차답게, 직접 요리하는 걸 꽤 선호하는 편이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내 입맛에 딱 맞는 안주를 만드는 즐거움도 있다.
리얼한 혼술 상차림을 돌아보니 조금 씁쓸하면서도 조금 뿌듯하다. 내가 만든 거니까 다 먹어치우는 것도 나, 그러니까 온 힘을 다해 만들게 되고 그러면서 요리 실력도 쑥쑥... 이라기보다는 재료만 좋으면 대충 볶건 굽건 삶건 중간 이상의 요리가 나온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만든 요리와 선택한 술의 조합을 맛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몰랐니? 혼술은 분위기로 마시는 거야
그날 가장 몸이 당기는 술과 안주가 마련되었다면, 이제 분위기를 만들 차례. 식탁에 술과 안주를 잘 차려놓고, 주종에 맞는 술잔도 꺼내놓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세팅한다. 혹은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줄 영화나 기분을 상큼하게 만들어줄 예능을 세팅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면 은은한 조명을 켜고, 첫 잔을 따른다.
천천히, 우아하게, 한 잔 들이켜고 안주를 음미한다. 이럴 수가, 너무 맛있다. 그래서 한 잔, 또 한 잔... 집에 갈 걱정 따윈 없으니 마음 놓고 2차, 3차를 즐긴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인생을 고민하면서 시작된 혼술은, 2차에 들어서면 90년대 가요를 열창하며 목이 좀 메다가, 3차에 들어서면... 여기까지만 하자. 혼술도 프라이버시가 있는 거니까.
홀로 취하다보면 때론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이때 전남친, 전여친에게 걸어서는 안 된다. 프로 자취 혼술러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다.) 멀리 있어 함께하기 어려운 친구, 오랜만에 생각난 친구 등 나의 주정을 적당히 받아줄 수 있는 친구이자 몹쓸 애교도 기꺼이 넘어가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그럴 때 듣는 친구의 목소리는, 참 좋다.
그렇게 분위기에 더 취하는 혼술을 즐기다보면, 어느 날 밤에는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빛나는 달을 만날 수도 있다. 조금 가라앉은 도시의 밤과 누군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집집마다의 불빛들, 그리고 환한 달. 이 모든 걸 공짜로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혼술의 멋진 점이다.
함께 마시는 술도 좋지만, 때론 혼술이 필요한 날이 온다. 술친구를 구하지 못한 날 혼술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종종 일부러 혼술의 날을 만든다. 그날, 나는 나만의 술과 안주를 구비해, 여느 분위기 좋은 술집 못지않게 내가 원하는 대로 테이블을 세팅한다. 익숙한 나의 소파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술잔에 술을 쪼르륵, 따른다. 샤워를 마친 보송보송한 얼굴로, 더없이 편한 고무줄 잠옷 바지를 입은 채. 다리를 쭉 펴고 한 모금씩 술을 마시며, 나는 나에게 말을 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러고 나면, 밤이 지나가고 하루가 시작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이리저리 치이고 깨져 흙투성이가 되다보면 또 가끔은 혼술을 하게 되는 날이 오고, 그렇게 홀로 나의 작은 집에 앉아 캬- 하고 한 잔 마시면, 어떻게든 아침이 오고, 나는 하루를, 매일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민낯으로 마시는 혼술 덕에 가끔은 민낯으로 나를 돌아보고, 좀 더 단단해진 얼굴과 말랑해진 마음으로 일상을 차분히 걸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