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는 일에 대하여
One Line a Day 라는 일기장을 쓰고 있다. 이 일기장은 5년 짜리 일기장인데, 기록하고자 하는 날짜 페이지를 열면 당해년도를 기재하는 작은 칸 옆으로 하루를 정리할 몇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이것이 다섯 덩이로 배치되어 있어 5년의 기록을 한자리에 모아둘 수 있다. 한 페이지가 다 채워지면, 해당 페이지의 날짜에 해당하는 5년 간의 기록을 마주하게 된다는 말이다.
일기장을 구매할 당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시간의 흐름을 좀더 면밀히 감각할 수 있었으면 했다는 것이었다. 선형적 시간을 살고 있으니 지난 일을 회기하거나 앞으로를 그려보는 일이 뜬구름 잡는 일 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 나의 근년들을 한 곳에 모아 기록하는 일은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기록의 가치 또한 배가시키는 일 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쌓이는 기록들을 통해 새롭게 느낀 것들이 있었고, 일기 쓰는 일에 좀더 색다른 맛을 더한 것도 같아 이런 감회를 주변인들에게 나누기도 했다. 일기 쓰는 일은 그렇게 대화의 소재가 됐다. 어릴 적 과제로 쓰던 일기, 속이 상하면 온갖 것을 내어두던 일기, 사랑에 실패하고 울며 적은 일기. 기록하고 기록을 기억하는 일이 주는 심경들이 나눠지던 자리였다. 여하튼 그중 5년 일기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던 몇몇은 같은 일기장을 찾아 그 자리에서 구매를 하기도 했다. 기대와 작정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이 일기장의 마지막 칸을 채워가는 해이다. 기대감의 구체적 얼굴을 마주하며 채워 나가고 있는 이 일기장에서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은 이런 것이다.
첫째, 비슷한 시기에 아주 비슷한 고민을 또 하고 있었다는 점. 누가 얼마나 아팠고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관련한 감상 같은 것들이 퍽 닮은 모습을 하고 비슷한 시기에 재연이라도 하듯 펼쳐쳤다. 우리에게 절기가 있듯, 내 일상에도 어떤 패턴 같은 것이 넘실거렸다는 말이 될테다. 매해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것들이 반복되었다는 말이 나무의 나이테 같이 느껴졌다.
둘째는 생각보다 감정 기록이 내 감정을 구체적으로 재생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맥락에서 파생된 것이 감정이니 감정만 남은 기록, 즉 내가 기록하지 않은 사건의 부재로 인해 생략된 사건을 가늠해보며 해당 날짜의 내 상태를 이해하기란 가히 불가능했다. 나는 나의 기록으로 난처한 느낌까지 받았다. 내가 내 스스로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할 수 있구나를 깨달았다. 쓰기의 흑역사 쯤으로 이해하면 될까.
셋째, 매일 쓴 날들, 매일 쓰지 않은 날들이 존재했다는 것. 어느 해에는 기록하고, 또 어느 해에는 기록하지 않았던 몇월 몇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예 기록하지 않은 날들과 기록의 자리에 성실했던 날들이 간헐적으로 있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5년의 몇월 몇일 중 내가 짧게나마 그날의 사건과 사유를 담기 위해 앉았던 시간이 아주 불규칙하지는 않았다는 것처럼도 보인다. 기록이 부재한 페이지들을 보면서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를 생각했다. 그곳에 있었는데, 기록하지 않은 내 그 시절은 왠지 더 멀게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기록 가운데 어떤 다짐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성장했으며, 세련되어 졌다는 발견이다. 이 부분은 나를 기특하게 했다. 실패했기 때문에 쓰여진 문장들이었지만, 그것들을 되짚으며 내가 아끼는 것들에 대해 환기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부모님에게, 또 친구들에게 향한 내 진심의 결을 마주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일로 나아가며 나는 내 한계 너머의 것은 기도로, 내 능력 안의 것들에는 새로운 동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런 것들로 나는 시간 자체보다 내 스스로를 좀더 면밀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도달할 어느 지점에 대해, 사실 지금의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인상을 더듬어보기도 한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 혹은 인정은 내가 나아가고 있음을 믿게 한다. 물론 여기에서 후진하지 않았다는 결론은 내가 기대하고 작정한 시점에서 이미 발생했다고 보고 가는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촘촘히 이해하려는 삶의 의미와 가치 같은 것들을 일기 쓰기를 통해 쌓아보면서, 나는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간다는 능동성을 확보하는 일. 나는 일기 쓰는 일이 바로 그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녁 상을 치우고, 가능하면 매일 아이들과 각자의 일기장을 갖고 앉도록 노력한다. ‘왜 써야해?’라는 얼굴에 “훗날의 너가, 지금의 너에게 분명 고마워할꺼야.”하고 답한다. 아리송한 엄마의 말에, 둘째가 한숨을 몰아 낸다. 아이의 일기장에 튼튼한 글자가 박히는 것을 보며 내 일기장을 연다. 2026년, 오늘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