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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태 Mar 17. 2020

남극통신 - 남극의 주방 2

미술&경제 전공 학부생이 남극에서의 5개월을 기록합니다

2019.11.21.


 간만에 찾아뵙습니다. 그간 좀 바빴다가 이제야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겨서 글을 씁니다. 일기는 매일매일 꼬박꼬박 쓰고 있지만 정리해서 남한테 보여준다는건 또 큰 결심을 필요로 하니까요.


 오늘 날씨는 아주 좋습니다. 모니터상으로는 영하 4.8도에 바람은 초속1.8미터 정도네요. 덕분에 낮에 소풍을 갔는데 장갑을 안 껴도 될 정도라서 사진도 편하게 많이 찍었습니다. 맨 위의 사진도 거기서 찍은거구요. 브라우닝 패스라고 동네 뒷산 같은 곳인데 차로 20여분 정도 올라가면 됩니다. 타고 간 차는 산타페인데 눈에서나 얼음에서나 잘 다닐 수 있게 타이어 공기압을 언제든 조절 할 수 있고, 기타 개조비용을 포함해 3억 정도 한다는군요.



 지난주와 이번주에는 고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많이 했습니다. 친구들, 선생님들, 교수님들, 동생들.. 남극 풍경 사진도 보내고 귀여운 친구들 사진도 보내고. 그리고 항상 따라붙는 부탁은 펭귄사진인데 만나면 꼭 올리겠습니다. 저도 정말 기대중이니까요. 


 뭐 여기 생활도 꽤나 괜찮아서 사람들이 외롭거나 사무치게 그립거나 그런건 아닙니다. 이따끔씩 생각 날 때가 있긴 한데 꽃빵튀김에 연유를 뿌리다가 한국에서 친구들과 마라샹궈집에서 먹었던 같은 메뉴가 떠오른다거나 하는 정도입니다.


 하루는 통신대원이 CCTV로 각 근무지를 보면 주방이 제일 재밌어 보인다고 하면서(우리야 뭐 소리지르거나 춤추거나 웃거나 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얘기를 해줬습니다. 하루 종일 혼자서 검은 화면을 보면서 얼굴도 안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해서 외롭다는 통신대원(참고로 통신대원은 헬기나 ATV등 모든 기지 출입 인원과 교신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외로움에 대한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주방에서 비슷한 나이대 3명이 즐겁게 일하는데 혼자서 하루종일 일하면 그것도 참 쉽지는 않겠다, 내년에 내가 나가면 조리장님도 혼자서 외롭겠다, 나도 1년동안 여기서 월동대 하라고 하면 외로워서 힘들겠다 등의 생각이요. 그러고 보니 다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만나면 언제든 호들갑을 떨어주거나 욕부터 하는 친구들. 고마워요 다들. 돌이켜보면 인복은 참 많았던 것 같네요. 여긴 해가 안져서인지 저녁 9시 44분인 지금부터 새벽2시인것 마냥 센치해지네요.


 윤태호 작가님을 만나서 싸인받은거는 외전으로 따로 쓰려고 했는데 생각난 김에 쓰겠습니다. 어디서나 열심히 일 도우시고 작업하셔서 존경스러웠습니다. 귀찮아하거나 힘든 기색 없이 친절히 대해주시기도 했구요. 경제랑 미대복전에 요리로 왔다고 하니까 적잖이 신기해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조선비즈에 10주년 기념으로 '남극 와보셨습니까' 라는 기획 기사?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자분이 펭귄팀하고 왔다고 했으니 제가 한 며칠 국을 퍼드렸을겁니다. 지금은 펭귄팀이랑 함께 나가서 펭귄 서식지쪽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사에 오류가 있던데 돌아오시면 말씀드릴까 생각중입니다.


 기지 최연소 타이틀은 아직 유지중인 것 같습니다. 새로 들어온 분중 제일 어려보이는 분께 나이를 여쭤보니 24살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아직 생물학적으로는 24살이니까요. 그분도 졸업까지 3학점 남았댔으니 빠른년생이거나 조기졸업생정도시겠죠.

 일은 이제 좀 적응이 된 것 같습니다. 여전이 손가락을 썰고 베이고 하지만 10년 넘게 일한 다른 두사람을 아등아등바등 따라가려고 하니 쉽진 않지만. 좀 힘들때는 월급 보고 버티자는 생각도 해봤는데(근데 인터넷이 느려서 은행잔고 확인이 안됩니다) 스토리에 올렸듯 온갖 익스트림한 경험을 하니까 굉장히 행복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온갖 귀한 식재료로 마음껏 요리하고 경력에 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아마 제가 일반 파인다이닝에 갔으면 샐러드만 계속 만들었겠죠. 물론 지금도 절반은 샐러드를 만들지만.) 배우는것도 경험도 참 많이 됩니다.


 여기 형님들은 참 재밌습니다. 가끔 있는 회식자리에서 나오는 드립들을 모아서 웹툰이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짜 웃겨요 정말.


 그나저나 기지에서 가장 유명한건 저희 주방크루 셋일겁니다. 하루 세번씩 모든 사람이 저희를 보기 때문이죠. 특히나 모두에게 국을 퍼주며 인사하는 저는 더더욱. 그리고 잠도안자고 티라미수를 만드는 조리장님 친구와 육수를 4시간씩 내는 조리장님 때.문.에 음식 칭찬이 자자합니다.  덕분에 저도 화장실 샤워실 정수기 앞 등 모든곳에서 만나는 모든사람에게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잠을 잘 못자고 일도 빡세서 힘들어하시는 분이 "여기선 정말 밥먹는 낙으로 산다" 하실때 적잖이 행복했습니다.



 아참, 그리고 책을 좀 읽고 있습니다. 매일 30분 정도?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101 시리즈에서 좋아하는 작가들것만 읽고 있는데 좋습니다. 특히나 김애란 작가님. 여기 그분의 소설집이 없어서 참 아쉽습니다. 박민규 작가님 작품도 좋구요. 이런데 있으면 장편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데 한강이나 아리랑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태백산맥이 있는데 군대에서 이미 읽었거든요.


 한국을 떠난 뒤 처음으로 머리도 잘랐습니다. 오른쪽은 조리장님이 세심하게 잘라주셔서 괜찮지만 좌측은 연필로 피부톤 입히듯 살살했는데 앗 하는 순간 바로 파먹히더군요. 결국 조리장님이 스크래치로 마무리해주셨습니다. 꽤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일화. 박사님 중에 한 분이랑 이야기하다가 제가 미술 전공이라는 얘기를 하게되면서 심사때 냈던 작품을 보여드렸습니다. 그 작품 사진을 달라고 하시며 제 번호를 저장해가셨는데 처음에 '김인태 화백' 으로 저장하시려고 해서 화백의 칭호는 50세 이상쯤 되어야 얻는게 아니냐고 했더니 '김인태 화가' 로 저장하셨습니다. 저는 비록 회화를 하진 않았지만 작가라고 하면 다들 글쓰는걸 생각할테니. 여튼 기분은 왠지 좋았습니다. 아직 남극 풍경을 보고 막 영감이 떠오르고 그러진 않지만 예전에 구상했던 걸 발전시키고 있기는 합니다.


 한국은 첫눈이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여기도 곧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습니다. 눈이 오는 것 보다는 어디선가 바람에 눈이 날아와서 2미터씩 쌓이는게 남극의 겨울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여기도 이번이 첫눈이 아닐까 싶네요. 한국도 많이 추워졌다고 들었는데 모쪼록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화상 조심하겠습니다. 역시나 그리고 오늘도 두서없고 센치한 글이 됐군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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