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태 Dec 07. 2020

데자뷰: 남극의 쉐프

와 이거 진짜 영화에 나온 장면이랑 똑같잖아!

 요근래 매주 토요일마다 한국에 있는 아이들과 화상통화를 한다. 부산에서 열린 극지체험전시회에 온 아이들의 질문에 이것저것 답해주는 시간이다. 지난번엔 해양대원분이 했었고 이번주엔 내 차례다. 원래는 조리장이 하는 건데 내가 유명세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조리장이 부담스러워해서 내가 대신한거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나름 세트장이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왠지모를 책임감에 외모도 마음도 한껏 준비를 하고 임했다.(그렇게 보이진 않겠지만. 아껴둔 흰색 조리복도 꺼내입었다.) 시작은 자기소개와 저녁메뉴였고, 귀여운 질문도 많았다. 얼음으로 빙수 만들어 보셨나요? 어떻게 하면 요리사로 남극에 갈 수 있나요? 명절에 송편 같은 음식을 만드시나요? 여가 시간에는 무엇을 하시나요? 와 같은. 그런데 뒤로 갈수록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사심?을 채우려고 하실수록 질문이 산으로 갔다. 시작은 진행자분의 결혼 하셨나요? 였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이래보여도 스물 네 살입니다ㅎ..” 아마 의례적인 질문이고, 가족이 보고 싶지 않냐는 뒤의 문항과 연계된 질문이었으리라. 그 뒤로 뭐 연봉이 어떻게 되시나요? 지갑에 지금 얼마가 있으신가요? 술도 드시나요? 같은 질문이 나와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짧은 순간에 얼마나 머리를 열심히 굴렸는지 모른다. 연봉 같은건 일반적으로 내 나이대 직장에서 받는 것보다 많은 급여를 받고 있다는 정도로 넘어갔다. 나중에 다른 형님께 이 얘길 하니 그럴 땐 “이 곳은 돈을 바라지 않고 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연봉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라는 모법답안을 제시해주셨다. 이게 왜 생각 안났지. 그래도 “남극에 얼음이 왜 녹나요?” 같은 질문엔 화석연료 어쩌구저쩌구 온실효과랑 지구온난화 애길 하면서 “어린이 친구 여러분들도 절약을 생활화해주세요~” 라는 아주 이상적인 멘트로 답변을 마무리짓기도 했다.

 사실 화상통화를 한 날에는 스테이크 120개 굽고 상하차 비스무리한거까지 해서 정신이 없었는데 다음날에야 깨달았다. 영화 ‘남극의 쉐프’ 에 나왔던 장면과 완전 똑같은 일이 어제 벌어졌었다는걸. 지원서 쓴다는 핑계로 무척 열심히 봤던 영화인데 뭔가 벅찼다. 이건 경험하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수많은 별거 없음 중에서 반짝이는 별일이었으니. 내가 아는 사람까지 등장했다면 더 완벽했겠지만 아무튼 대단했다. 실제로 다른 대원 어머니는 미리 얘기 안 하고 전시회에 참석하셔서 깜짝 놀래켜주기도 하셨다. 다만 진행자의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라는 물음에 ”음.. 여기도 지낼만 한 것 같은데..“ 라는 대답을 해서 문제였을 뿐.. 어쩐지 진행자가 집요하게 물어보더라는 탄식은 덤.



 아참. 그리고 쇄빙선 아라온이 왔다. 처음 보는건데 빨간게 눈에 확 띄고, 진짜로 얼음을 깨부수고 오는게 신기했다. 먹을걸 잔뜩 싣고, 책이랑 각종 악기와 함께 왔다. 쇄빙선이 왔다는 말은 누군가 떠난다는 말. 한달 조금 넘게 함께했던 조리보조 한 분이 가셨다. 날 엄청 챙겨주던 착한 사람이었는데 아쉽다. 물론 일손이 줄어 당분간 무척 바쁜것도 걱정이긴 하지만, 이젠 한국에 가야 볼 수 있는 사람이니 다가올 그리움에 먹먹해졌다. 저때까지만 해도 귀국하면 곧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아직도 못 만난 사람.. 오후에 배로 떠나서 인사를 했는데 저녁시간에 잠깐 여유가 생겼다며 다시 기지를 방문해서 깜작 놀래켜준 사람.. 예상치 못해서 엄청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좋아하는 과자가 뭐냐고 묻길래 맛동산이라고 했더니 배에 도착해서 다른사람 편으로 맛동산을 보내줬다. 코끝이 찡. 아끼고 아끼다 먹었다. 뭐 나중에 내가 타보니 쇄빙선은 과자가 매일같이 리필되는 곳이긴 했지만, 생각해서 챙겨준건 아직도 고맙다.


 일기를 보니 이때 처음으로 이런 고민을 한 듯하다. ‘오늘 문득 든 생각. 남극에 온 건 나를 이루는 것중 극히 일부인데 타인들에겐 이 타이틀만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큰 틀에선 지금도 변하지 않은 생각이지만, 귀국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서 남극이 차지하는 부분이 커져가는 것 같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춥거나 덥거나, 노을이나 무지개를 보거나 뭘 먹을때조차도 문득문득 남극이 떠오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펭귄은 귀엽지 않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