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제주트레일러닝 참가후기
"강한 바람으로 인해 항공기 사이에 연결관계로... 지연되는 점 죄송합니다. "
전혀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하다는 방송이 계속 나왔다.
한 시간 가까이 연착이 되다 이륙한 비행기는 제주 상공에 다다르자 강한 기류에 크게 흔들렸고, 영화에 나오는 전투기처럼 날개가 좌우로 휘청거렸다.
어린아이들은 여기저기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힘을 주어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우리가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면서도 웃을 수 있는 건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두려웠다.
다행히 착륙 시에는 지상에 강한 바람이 잠시 불지 않아 무사히 착륙했다. 긴장이 풀리니 아이가 좋아하는 포켓몬 비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지만 바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삼일 동안 선수들과 동거동락하며 지낼 표선체육관에 가기 위해 제주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아침부터 빈 속으로 와서 허기지고 멀미가 났다. 그래서 버스터미널 안 허름한 식당이 보이는 대로 바로 들어갔다. 나는 원래 휴게소와 터미널 음식을 신뢰하지 않는다. 좋은 목에 자리 잡고 그저 이동하는 뜨내기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탓인지 음식엔 정성이 없다.
나는 그저 허기나 달랠 요량으로 고기국수를 시켰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맛있었다. 잡내 없는 돼지고기와 입을 감싸는 뼈육수 맛에 눈이 커졌다.
'아, 드디어 제주도에 왔구나. 살았다!'
예상에서 벗어나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버스에 올랐다.
비가 조금씩 내릴 때 버스를 탔는데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비는 점점 거세졌다. 버스 정류장에서 체육관까지 걸어가는 길에 홀딱 젖고 말았다.
체육관에 도착하니 비에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비는 두꺼워지고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나보다 조금 늦게 비행기를 타기로 한 참가자들은 착륙하지도 못하고 하늘만 뱅뱅 돌다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많은 수의 참가자들이 도착하지 못했다. 체육관 천장을 세찬 비가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굉장했다. 체육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괜히 왔나 봐....."
"집에 가고 싶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내일 배회 하긴 하는 거야?"
제주트레일러닝은 스테이지레이스이다. 총 100km의 거리를 삼일 동안 나누어 진행을 한다. 제주의 아기화산인 오름과 바다의 올레길을 달린다.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거세지는 바람으로 결국 첫날의 일정은 둘째 날 올레길 코스와 바뀌어 진행이 되었다. 원래는 하도 해수욕장에서 표선해수욕장까지 약 30km의 거리를 달릴 예정이었지만 초속 10m/s를 웃도는 강한 바람으로 섭지에서 출발하는 단축코스로 진행되었다.
강한 바람에 실린 비가 바늘처럼 살에 꽂혔다. 북으로 달려가는 우리를 강한 남풍이 끊임없이 밀어냈다.
그렇게 억지스럽게 바람에 저항하며 첫날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스탭도 참가자도 모두 흠뻑 젖었다.
"내일도 비와 바람이 몰아칠 예정입니다!"
다음 날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하는 저녁 시간,
사회자의 이 말에 참가자들은 환호성을 외쳤다. 악천후가 지속될 거라는 소식에 오히려 기뻐했다.
하지만 둘째 날은 기대와는 다르게 화창한 날이었다. 첫날 비행기로 제주에 오지 못하고 둘째 날부터 참가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지 않으니 아쉬워했다.
아이들은 언제나 달린다.
겨우 여기서 저기만치 가는데도 달리고, 저어만치 갈 적에도 달린다.
러너들이 달리기에 빠져드는 이유도 아마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특히 비가 고인 웅덩이를 참을 수 없다. 어른들은 물 웅덩이를 피해 걷지만 아이들은 첨벙거리며 꼭 밟고 지나간다. 물이 내는 소리, 일렁이는 모습, 그리고 비가 몸에 내리는 감촉을 사랑한다.
달리기에, 특히 비를 맞으며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달리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아이와 같았다.
아직 우리에게 순수함이란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강한 비바람은 다시 체육관 천장을 힘차게 두들겼다.
재난문자가 울려댔다. 비로 위험하니 산에 오르는 말라는 경고문자가 왔다.
운영진들은 새벽부터 바쁘게 뛰어다녔고, 결국 안전상의 이유로 36km 코스는 큰사슴이 오름과 따라비 오름만 돌고 내려오는 20km 단축코스로 진행되었다.
출발하자마자 시작된 진흙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말로 유명한 가시리에서 마지막 대회가 열렸는데, 비로 질어진 길에 어는 것이 진흙이고 어느 것이 말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길에 발을 한번 들이고 나니 참가자들은 그저 앞만 바라보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말똥밭에 달리고 있는데 이상하리만큼 신이 났다.
태풍과도 같은 비바람으로 꾸역꾸역 대회가 마무리되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집에 돌아와 진흙범벅이 된 신발을 헹구는데 스무 번이고 마흔 번이고 헹구어 내어도 뻘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말똥밭을 달리는 것은 즐거웠지만 뒤처리가 무척 고됐다. (양말은 살리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물웅덩이를 피해 걷고, 진흙에 옷이 더러워지기를 꺼리는 건 어쩌면 어른들만의 생각이다. 깨끗한 집에 보기에 더 좋고, 비와 흙에 옷이 더러워지면 세탁하기가 귀찮다.
하지만 집이 어지럽게 장난감을 늘어놓고 놀고, 웅덩이에서 첨벙거리며 비 맞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내가 조금 더 불편하면 손님들은 입은 즐거워진다.'
골목식당의 연돈 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편안함을 위한 기준에 맞추기보다
비와 진흙( 그리고 말똥) 속을 누비며 즐거워했던 나를 생각해 보며,
내가 조금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아이의 행복의 기준에 맞추어 주는 것이 좋겠구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