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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Jul 15. 2020

집은 무엇일가

-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끝자락 젊은이의 늦지 않았으면 싶은 고민

전세 만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남편의 회사 직무 발령과 그로 인한 타지역행이 2년 후로 점쳐졌고, 무엇보다 아이가 2년 후면 초등학교 입학을 한다. 나는 서울에서, 남편은 지방에서 주말부부로 지내다 출산과 육아로 퇴사를 하고 남편 직장 근처로 이사온 지 4년 째. 여러가지로 '정착지'를 찾아야할 마지노선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었다.


문득문득, 때론 조급하게 과연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가, 살아야 하나, 생각하고 찾아보았다.

나와 아이가 안전하고 안락하게 지내며 아이가 학교 다닐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 일을 놓고 심히 우울해진 마음을 바로잡고 꺼지지 않은 일에 대한 욕망(?)을 펼 수 있는 기회의 땅이 어디일지, 그렇다면 워킹맘 라이프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 서울에 계신 친정 엄마께 SOS를 칠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 가정이 있는 곳으로 주말마다 오고 가야 할 남편이 이동하기에 조금이라도 편리한 곳은 어디일지.


생각해야 할 것도 많았고,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부질없게 만드는 압도적 기준이 있었으니, 바로 '돈' 이다.


결혼부터 지금까지 양가 도움 없이 집을 얻고 살림을 꾸렸다. 친정에서 그릇이며 냄비며 주방 꾸리들을 선물해 주셨고, 시가에선 예단이니 하는 것을 받지 않으셨다. 성실한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언젠가는 태어날 자식 앞으로 꼬박꼬박 적금을 두고 있을만큼 성실했고, 나 역시 박봉이라는 업계에 있었지만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 혼수도 하고 대출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신혼 전세금도 더했다. 그렇게 신혼 둥지를 정하고 서울 아파트 전세를 계약할 즈음 남편이 "이 집을 그냥 살까?" 했는데,


정직했고 아둔했으며 다소 현실감각이 떨어졌음을 이제서야 시인하는 내가 당시 한 말.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닌데 뭐하러 사?"


당시 단 몇 천의 대출로 매매가 가능했던 그 집은 3년이 지난 지금 값이 딱 두 배가 되었는데, 그 차이가 몇 억이다.

왜이리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었을까, 서른을 훌쩍 넘길 때까지 어른의 사고가 없었던 것일까, 왜 남편은 미련맞은 아내를 설득하지 못했을까, 후회와 자괴가 물밀듯 몰려왔다. 시작은 비슷했던 두 친구였지만 아파트를 빨리 매매한 자와 이러저러한 이유로 전세를 전전했던 자의 현재 자산의 차이가 이만큼이나 난다...는 식의 보도(왜 뉴스에서 이런 주제의 꼭지가 나오는 것일까)와 다양한 콘텐츠 들을 접할 때면 이미 낙오자가 된 심정으로 한숨만 이어졌다.


어린 아이를 둔 평범한 3, 40대 부부로서 살고 싶다 싶은 곳은 다른 많은 이들도 살고 싶어 했거나 가지고 싶어 했고 그래서 집값은 껑충껑충 뛰고 있는데, 수요와 공급, 경쟁의 논리로서는 맞는 이치이긴 하지만, 물가상승률과 임금상승률, 은행 이율은 집값 상승률과 극히, 너무나 무관했다. 계속 살 집이어야 매매를 한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대적 박탈감이 극도에 달했다. 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질타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전세계적으로 대도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흐름에 한국 역시 진즉에 합류되었다는 걸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었고, 이 소용돌이 속에서 나에게, 우리에게, 저마다에게 '집'이 무엇인지, 그것을 '소유'하고 '향유'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 점점 커져간다.


'안 팔면 사이버 머니'

'고생 속 존버 끝에 상급지 이동한다'


급하게 가입한 부동산 관련 커뮤니티를 며칠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니, 우리나라 민족의 어휘력과 창의력에 정말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한민족의 애이불비나 해학은 정말로 최고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다가, 그래, 나도 버티자, 어떻게든 버티자, 길은 다 있다.(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존버'에도 목표는 있어야 하고, 나란 사람을 40여 년 간 들여다 본 결과 물질적인 욕망이 엄청나게 크지도 않고, 그럴 역량도 없음을 깨달은지 오래다. '남들 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애매한 욕망의 기본 가이드라인은 분명히 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을 때 사 먹을 수는 있어야 하겠지만, 굳이 하겐다즈 못 먹어 속상하지 않고 돼지바 초코맛에 충분히 기뻐하는 부류다. 아, 나란 인간.


또 사회로의 첫 발을 좀 더 편히 내딛을 수 있게 끝까지 자식에게 최대한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싶다는 남편과 달리 난 가르치는 것까지 최선을 다해 주면 그걸로 부모의 역할은 끝이라는 생각이기에, 자식에게 재산을 남겨줄 마음은 현재까진 전혀 없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많이 싸우게 되겠지.)


그렇다면 '집'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물론 되기만 한다면야 춤을 덩실덩실 추겠지만(그런 상상을 두어번 쯤은 해 봤다;;), 로또 1등이나 청약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초미세먼지 입자 크기 수준이고, 구옥의 녹물과 재개발이라는 희망고문 사이에서 싸워가며 상급지로의 점핑을 꿈꾸는 존버 라이프가 내게 최고의 대안도 아닐 것 같다. 스무 살 이후면 어떤식으로든 집에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아이이기에 앞으로 15년, 가족이 모여 아늑하고 편안하게, 불편이 있더라도 그것이 더 나은 물질적인 미래만을 위한 가혹한 희생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아직도 나 아둔하고 미련맞은 것일까.


아빠는 퇴직 후 고향에 내려가 한옥을 짓고 귀농하셨다. 건축비 뿐 아니라 수시로 들어가는 유지 보수 수리 비용을 들며 '돈 안되는 길로만 참 잘 가신다'는 나를 포함한 가족들의 푸념이 종종 등장하지만, 그 피를 이어 받았는가, 오래 전부터 허름한 주택을 내 생각대로, 우리 가족의 모습에 맞춰 꾸미는 그림을 그리곤 한다. 행복한 삶, 잘 사는 인생과 집은 어떻게 발 맞추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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