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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Sep 23. 2020

결혼, 그 자립의 길

자립. 스스로 자(自), 설 립(立). self-reliance.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섬.


인터넷에서 우연히 기린의 출산과정을 보게 되었다. 산고를 겪는 어미 기린 모습에 짠함도 잠시, 머리를 때리는 충격은 어미 뱃속에서 막 세상으로 떨어진(정말 훅- 떨어져 나온다;) 아기 기린이 비틀거리며 네 발로 서려다 주저 앉는 모습이었다. 어미 기린을 포함에 주변의 다 큰 기린들이 하는 일은 아기 기린 주변에 모여 이를 바라보고 혀로 머리를 핥아주며 기다리는 것 뿐. 아기 기린은 몇 번이고, 자꾸만 기울어지는 제 다리를 세우고 다시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스스로 선다. 그리고 어미 젖을 찾아 문다. 당분간 보살핌이 따르겠지만 동물들은 태어난 직후 스스로 땅을 딛고 서 젖을 찾아가 무는 그 순간부터 자립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언제 자립을 실천하는가.

그 시기는 흔히 고교 졸업 후나, 청소년의 나이를 벗어나는 때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자립의 제1요소는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의식주에 필요한 경비를 감당할 수 있거나 그러고자 하는 의지가 강할 때여야 맞지 않는가. 나의 경우 공부를 좀 더 하고 뒤늦게 취업을 해서 직장생활을 10여 년 할 때까지 부모님 집에서 거저 먹고, 얹혀 자며, 빨아주시는 옷 입어 생활했기에 30대 중반에 이를 때까지 자립은 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난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살고 있노라며 깊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고등학생 때 감기 기운이 있어 하교 길에 혼자 약국에 들러 약을 사 먹었을 때 '아, 내가 다 컸구나' 싶었고, 대학원 다닐 때 닳은 구두 굽을 수선집에 맡길 때 '나도 어른이구나' 했다. 그게 뭐라고.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야무지다는 평이 내게 새삼스럽지 않았으며, 심지어 연애할까 만난 상대 중 내가 당차보인다며, 허술한 자신의 빈틈을 채워달라며 청혼한 이도 있었다. 결혼할 때는 '식'을 치루기 위한 크고 작은 일들을 스스로 알아보며 결정했고, 신혼집을 정할 때도 양가의 도움은 없었으니 우린 참 자립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바람직한 성인이라 여겼다. 운이 좋게, 감사하게 내 할 일이나 챙기며 살아온, 안전한 울타리 속 어른이, 딱 그것이 나였는데.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결혼'을 통해서도 내 삶에 대한 책임의지가 동반된 진정한 독립이 아닌 '동반자'라는 제 2의 안전한 울타리를 찾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제야 생각해 본다. '영혼이 통하는 소울메이트'나 '내 인생의 비타민' 같은 허무맹랑한 말과 함께 '건실한 배우자'를 찾는다는 건 '내 마음도 잘 살펴주지만 우리의 먹고사니즘도 크게 위험하지 않게 해 주는' 사람을 원한다는, 합리적인듯 하지만 이기적인 발상 아니었을까. 왜 내가 배우자에게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는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한 노력보다 덜하였을까.


다행인 것은, 결혼은 무의식 속에서도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장면들로 채워진 현실이고, 그 장면들은 운명적 만남이었거나 여러가지 비슷하게 맞는 사람이어서나, 여튼 나름의 계기로 선택한 사람이 결코 나에게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씩 깨닫는 순간들로 그려지게 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이러하다.


이 아찔한 깨달음의 연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혼 이후의 하루가 만들어 짐을 최근에서야 절실히 깨닫는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독립과 책임이 절실하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고, 다음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영끌한 패닉 바잉'까지는 아니더라도, 날로 치솟는 집값에 정착지를 찾아야 할 때가 가늠되어진 터라 최근 몇 달 불타는 검색과 발품을 더해 생애 최초로 집을 소유하기로 정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 많은 고민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제한된 상황 속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의 최대한 책임질 수 있는 결정들을 내려야 했다.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고, 대신해 주지 않는, 나의 미래를 오롯이 내 등에 짊어지는 과정. 공동명의로 하며 함께 자금조달계획서를 쓰려는데 부동산에서 "사모님께서는 이 금액을 어떻게..."라고 슬그머니 묻는다. 그간 직장생활로 번 돈이라 하니 안심의 기운이 싹 도는 표정. 허울뿐인 프리랜서, 월급없는 가사육아노동자가 되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서글프고 당황스러운 경우가 종종 생긴다. 아, 다시 한 번, 자립해야지. 나를, 적어도 나의 아이만큼은 책임질 수 있는 자리, 배우자의 위기를 감당해 낼 수 있는 가짐, 그것들을 만들어야지.


거두기 힘든 패를 던지고 나니 마음 한 켠이 가벼워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 무거운 추가 맞은편에 버젓이 자리한 느낌이다. 감상에 좀 빠져볼까 했더니 아이 목에 불같이 발진이 일어난다. 견과류 알러지가 있는 아이가 먹은 건포도에 호두 가루가 조금 붙어 있었던 것 같다. 약을 먹여야 하는지, 어떤 약을 얼마나 먹어야 하며 병원에는 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 후에 가라앉을 지, 1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판단하고 대처해야하는 약 네 다섯가지 사안들을 처리하니 아마도 다 감하진 못하겠지만 오늘 하루도 약 580개 쯤의 '책임져야 하는 크고 작은 선택들'이 날 기다리고 있겠다 싶다. 옳은 판단이었던 그렇지 않던, 그 선택들이 내일을 만들 것이다. 그럼 또 선택하고 그 결과를 다음 날의 내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겠지.



by int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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