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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Apr 07. 2021

엄마와 피아노

오랜만에 서울 친정집에 가 피아노를 쳤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천재적인 재능은 없으나 원하면 전공을 해도 좋다'는 말을 피아노 학원 선생님에게 듣고 미련없이 등을 돌렸던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오롯이 내 것이었던 피아노. 손가락이 굳은 지 오래나 피아노를 쳤다 하는 사람들의 대표 레퍼토리 '엘리제를 위하여'를 매끄럽게 시작할 때마다 엄마는 이야기 한다. "난 맨날 쳐도 저런 소리가 안 나와."


엄마는 10년 간 모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8남매의 맏며느리로 남편의 형제자매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아들 딸 밥 벌이 하게 키워놓고 시어머니 봉양까지 끝나니 환갑의 나이가 되었고, 그때서야 자신의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나도 저렇게 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며, 그간 미뤄두었던 바람에 다가가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마침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엄마 또래이신듯 동네 친구로, 선생님으로 서로 뜻이 통하시는 것 같다. 집안 대소사에 자신의 일이 우선순위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서로가 잘 아는지라, 레슨비는 횟수로 셈한다는데, 그래서 한 달에 학원 행이 서너번 일 때도 부지기수고, 달을 건너 뛰는 경우도 많다. 1년 중 학원에 나간 기간을 다 합쳐도 남들 석 달 다닌 것 쯤 된다 하니 학습성취도 및 효율성 면에서는 처참할 수준이겠다.


엄마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할 때도, 사회생활과 연애에 바빴던 나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너무 늦었는데' 싶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들의 큰 관심 없이 시작된 엄마의 도전이 올해로 9년 차. 나도 놀라고 엄마도 놀랐다. 얼마 전 예순 아홉 생신을 맞은 엄마는 지금도 피아노를 치고 배우고 계신다. 동요도 치고 가곡도 치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두며 외벌이가 되어보니 시간이든, 돈이든, 꿈이든, 내 몫으로 뭔가를 빼놓기가 얼마나 힘이 든 건지 알게 됐다. 새출발의 기반을 뭐라도 만들어 낼 줄 알고 퇴사했지만 전전긍긍하며 일상 속에 나를 수시로 놓쳐가며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마흔이 되었을 때는 절망스러웠다. 1년 후 이사를 생각하기에 지금 사는 곳에서의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이것저것 자격증이라도 찾아보려 마흔 하나가 되어 살펴 볼 때도 가슴이 뻑뻑해졌다. 인풋을 하려면 눈에 그려지는 아웃풋이 있어야 했고, 그건 최대한 명확해야 했다. 불투명한 꿈과 현실을 박차고 나가기 위한 시도에 무엇도 쉽게 내어지지 않는 현재가 내 발걸음을 점점 더 무겁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는게 가장 쉽고 편했다. 눈을 감고 잠든 아이 옆에 누워 새벽녘 아이가 걷어 차버린 이불을 다시 몇 번 덮어주면, 그렇게 저무는 하루와 새로운 하루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지만 스스로 매일 울고 있는 날들.


김훈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설 안에서 언제나 현실을 묵묵히 견디어 내는 이들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놓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위대하고 힘겨운 하루하루가 어떻게 보통의 날들을 만들어내는지 작가는 언제나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감사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버텨야 하는 것일까. 잘 버티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엄마가 참 고맙다. 엄마가 버텨주어서 딸로서 고맙고, 자신을 잃지 않고 행해줘서 여자로서 고맙다. 아직 내 마음은 아득한 곳에 엎드려 있지만, 지금 너를 위해 무엇을 시작해도 좋다고, 충분하다고 엄마가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맙다. 집안 대소사에 치여 허덕이는 엄마를 볼 때마다 "이럴 거면 결혼 왜 했냐"며 농담 반 섞인 말로 엄마 손을 거들곤 했는데, 엄마가 그때 어떤 '반란'을 일으켰더라도 나는 엄마를 이해하고 응원했을 것이다. 그때는 여자로서, 지금은 엄마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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