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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Apr 30. 2021

스스로 큰다는 것

남편 회사에서 나눠주는 텃밭을 올해 작게 분양 받았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으니 함께 흙도 고르고, 씨앗이나 모종도 심으며 식물이 자라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다 싶었다.


분양받은 땅의 흙을 고르고 고랑과 이랑을 만들었다. 허리 디스크가 있는 남편은 전날 한의원에서 침을 맡고 오며 두 세 시간 작업을 위한 나름의 준비태세를 갖추었지만, 때마침 불어온 강풍과 분명 6년 간 운영되던 텃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 파도 나오는 돌덩이들과의 싸움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 이주민들이 땅을 개간해 삶을 개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나, 책에서 한 두 줄로 서술되었던 그들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 고작 서너평 땅 앞에서 떠올리게 되다니.


'무엇이든 내가'(장난감 치우는 것 말고) 증상에 빠져 있는 아이는 곡괭이 질도 제법이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이 노동력이라는 말을 실감. 이랑과 고랑이 제법 만들어지고 시내에 나가 여러가지 모종도 사와 심었다. 초보 텃밭러인 우리 부부와 아이 모두에게 제법 빨리 과실을 만나게 해 줄 당근, 딸기, 수박, 옥수수, 상추 선택.

밭 가는 아들 뒷모습이 듬직하네.

요즘엔 아이를 어린이집에 바라다주고 나오며 바로 옆에 있는 텃밭에 나가 물을 주는 것이 아침 일상이다. 당근 모종이 유난히 작고 약해 비실비실 땅 위에 엎드려 있거나 노랗게 잎이 타들어가더니, 하루 이틀 지나며 줄기에 힘이 차오른다. 머리를 들고 목을 세워 어깨를 편다. 먹을 만한게 나올까 싶던 딸기 모종에서 벌써 꽃이 두 송이나 폈다. 아마도 죽었을 것 같다고 남편이 말한 상추는 어느 새 푸른 잎을 들어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고 있다.

절로 크는 아이들

참 신기하다.

우리는 고작 흙 속에 돌들을 고르고, 그 흙에 뿌리를 넣어준 것 밖에 없는데. 물을 흠뻑 준 것 밖에 없는데. 힘을 못 쓰네, 다 타들어갔네, 그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줄기들이 하루, 이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부쩍 내고 있다. 스스로 크고 있다. 스스로 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하는 생각이다. 아이는 스스로 크는구나.


별스럽게 잘 해주는 엄마가 아닌데, 그저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그것도 그럭저럭 해주는 엄마인데 아이는 웃고, 까불고, 잘 자고, 그러면서 성큼성큼 자라있다. 부모의 노력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생명이 자라면서 내는 푸른 빛이 그렇게 만든다. 이 정도밖에 해 준 것이 없는데도, 생명은 항상 더 푸르게 빛난다.


산전 준비랄 것도 없이 생겨나 건강하게 태어나 준 것도 감사한데, 별스런 것 없이 키워도 때가 되면 이가 나고, 말을 하고, 최근엔 유치 하나가 빠지기도 했는데, 어느 새 글자도 쓰고 읽는다. 편식은 있지만 밥을 잘 먹고, 얼마 전 돌에 걸려 넘어져 입술과 순소대가 찢어져 응급실에 가긴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어쩌면 아이가 아팠던 날들을 부모는 지나면 큰 일 아니었다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혼자 노는 걸 즐겨 사회성이 조금 걱정되긴 해도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운 아이로 자라서, 절로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앞으로도 부모 노릇은 나름의 최선을 다 한다 싶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지금처럼 절로 푸르게 자랐으면 하는 욕심을 감사하는 마음에 얹어 본다.

차에 싣고 다니는, 엄마 장화 아빠 장화 아이 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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