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 Chungking Express> (1994)
세상엔 정말 많은 영화들이 있다. 그 많은 영화들 중 몇 개는 누군가의 인생 영화가 될 수도 있고, 몇 개는 누군가에겐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중경삼림’은 내가 이번 휴가 때 제일 먼저 관람한 영화이고, 상영이 시작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취하다. ‘무엇에 마음이 쏠리어 넋을 빼앗기다.’ 표준국어사전에 실린 ‘취하다’의 두 번째 뜻. ‘영화에 취하다’라는 말은 ‘중경삼림’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음악과, 왕가위 감독의 강렬한 카메라 연출은 나를 ‘중경삼림’에 취하게 만들었다.
왕가위 감독과 ‘화양연화’, ‘타락천사’, ‘2046’, ‘아비정전’, ‘열혈남아’ ‘중경삼림’등 그의 대표작들은 이전에 이름들만 스쳐가듯이 들었을 뿐, 딱히 홍콩영화에 관심도 별로 없었기에 내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영화가 될 뻔했다. 그렇게 홍콩영화와 나는 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달 전에 ‘무간도’ 시리즈를 접했고, 홍콩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친구와 ‘왕가위 감독 재개봉 특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가 ‘중경삼림’이 왕가위 감독의 색이 제일 잘 드러나고 완성도도 높다고 추천해준 것이 나를 휴가 나오자마자 메가박스로 달려가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고맙다 친구야. 너 덕분에 인생영화 하나 더 생겼다.
‘중경삼림’ 속 홍콩의 모습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경찰 넘버 223 하지무와 마약 밀매상과의 사랑을 그린 1부가 특히 그랬다. 지나치게 퇴폐적이라고 생각했다. 연출의 의도도 있겠지만, 찾아보니 당시 홍콩은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이라 실제로 마약 거래, 강도 등 범죄가 공공연하게 일어났고, 혼란스러운 세기말적 느낌이 강했다고 한다. 이 요상한 곳이,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이 독특한 곳이 왕가위 감독을 만나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경찰 223과 663의 사랑 이야기가 더욱 순수하게 빛나 보이는 것도 이 퇴폐함 덕분일 수도 있겠다. 1부와 2부 두 사랑 이야기의 순수함은, 영화의 ost ‘몽중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마구 헤집고 다니는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의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한 편의 시 같은 영화였다. 지금 내가 감상해도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영화인데, 처음 개봉했을 당시 극장에서 관람했을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은 그 크기가 가늠이 안된다. 그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 질투가 난다. 당시 홍콩으로 떠나고 싶다.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다음 왕가위 재개봉 특집을 기다린다. 그때면 극장으로 다시 떠날 준비도 돼있겠지.
계속 ‘중경삼림’의 OST가 머릿속에 맴돌고, 장면들이 그려진다. 아직 ‘중경삼림’의 취기에서 덜 깬 것 같아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 취기의 유통기한은 내가 죽기 직전까지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