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턴작가 Jul 01. 2022

<헤어질 결심>'헤어져'라고 쓰고 '사랑해'라고 읽는다

<헤어질 결심 / Decision to Leave>(2022) 리뷰

※영화 <헤어질 결심>과 <미스트>의 내용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 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 다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안개-정훈희, 송창식

보통 남녀가 사귀기 이전, 그러니까 썸을 타면서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새벽에 짙게 낀 안개를 뚫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자욱한 안개를 따라 조심조심 운전하며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고, 마침내, 목적지인 상대방의 진심에 잘 도착할 수도 있다. 물론 햇빛 쨍한 날씨에 아우토반을 달리듯 상대방의 심장을 향해 질주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하지만 난 확실히 그쪽 부류는 아닌 듯하다. '오늘부터 우리 1일이다!'라고 말하기 직전까지 썸을 타는 기간이 1달에서 2달은 기본으로 걸리니까. 느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마침내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의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이 대사에 대한 영화를 감상하기 전과 후의 느낌이 확 다르게 다가온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그러한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주인공 해준으로 하여금 사망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사망자의 중국인 아내 송서래를 수사하는 과정을 담는다. 이 해준의 수사 과정은, 남녀가 안개를 뚫고 상대방의 진심에 도달하는 사랑의 과정과 굉장히 비슷하다.


안개-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을 말한다.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이것이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다뤄질 땐 인물들의 시야를 흐림과 동시에 이성적 판단을 불가하게 만드는 장치로 주로 활용되는데, 프랭크 다 라본트 감독의 2008년작 <미스트>는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안개의 이러한 특성을 잘 드러낸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한 마을에 기이한 안개가 자욱이 깔린다. 평화롭던 마을을 덮친 안갯속에서 괴수들이 나와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점점 통제력과 이성적 판단력을 잃어 간다.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린 주인공 일행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군인들이 사태가 종결됐음을 선포한다.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죽인 주인공의 눈물 맺힌 절규로 영화는 끝이 난다.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이라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헤어질 결심>의 안개와 주인공의 최후는 <미스트>의 그것과 꽤나 닮아있다.


해준과 서래

박해일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매우 섬세한 연기를 보여준다.

극 중 주 배경이 되는 동네인 '이포'는 안개가 매우 잘 끼는 곳이다. 이 안개는 직업윤리 투철한 형사 해준의 품위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마 서래를 처음 만나 취조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취조 중간에 식사를 하는 장면이 꽤나 재미있는 게, 취조실에서의 식사 메뉴는 자장면이나 국밥이라는 클리셰를 타파하고 남녀가 단둘이 앉아 고급 초밥을 먹는 모습은 마치 데이트를 연상시킨다. 식사 후 양치를 하는 깔끔함까지. 것 보기엔 그저 취조 과정일 뿐인데 왠지 이상야릇한 느낌을 풍긴다. 그렇게 해준은 점점 서래에게 빠져 서래가 범인이 확실하니 제대로 조사하자는 파트너의 의견도 무시한 채 점차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된다. 물론 해준은 기본적으로 직업윤리가 투철한 형사이기에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스스로 노력은 한다. 습관처럼 인공 눈물을 투여하는 행위가 그러하다. 인공 눈물을 투여하는 행위는 안개로 인해 흐릿해진 시야를 깨끗이 하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해준의 의지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범인이 아니길 바랬던 해준의 심장은 서래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발견되며 결국 붕괴됐지만, 서래에게 증거를 버리라고 말하며 끝내 감정이 우선시 된 선택을 한다. 이것은 해준의 헤어질 결심이었으며, 서래에게 있어선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산 밑 바다

해준을 향한 서래의 사랑은 해준의 헤어질 결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나고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서래의 이 대사는 그동안 해준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이용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는 것에 대한 고해성사이자, 해준에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으며, 해준의 곁에 미결로써라도 영원히 남기 위한 그녀의 헤어질 결심이다. 해준으로서는 속을 알 수 없었던 안개와도 같았던 그녀는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남기고 그 자체로 투명한 바다가 된다. 스스로 산 아래 영원히 존재할 바다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해준은 품위 있는 형사이고 자신은 살인자이므로, 자신이 해준 곁에 있으면 그가 계속해서 붕괴될 걸 알았기에.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원했던 서래는 결과적으로 형사에게 그녀의 심장을 바친다.


결국 그들의 '헤어질 결심'이란, 역설적이게도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의 표출이자, 서로를 향한 외침인 것이다.


안개, 비, 바다

내 마음의 울림이 들려요?

<헤어질 결심>에서 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우선 영화 전반적으로 이포에 깔려있는 안개는 해준과 서래의 심리 상태와 이들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이 안개는 1부 후반부에서 로 변주되는데, 해준과 서래가 절에서 데이트할 때이다. 지표면에서 둥둥 떠다니던 물방울이 모여 땅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안개는 걷히지만, 왠지 구슬프게 내리는 빗방울들은 이들의 결말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는 2부의 결말부에 가서는 바다로 변주된다. 안개는 완벽히 걷히고 투명한 파도 위로 쨍한 햇살이 내리쬔다. 이때 산처럼 단단했던 해준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완벽히 붕괴된다. 그리고 서래를 찾으며 자신이 계속 투여하던 인공눈물이 아닌, 눈물샘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마침내.


품위있는 단일한 감독, 박찬욱

이번 박찬욱x송강호 특별전을 통해 박찬욱 감독의 전작 <올드보이>와 <아가씨>를 극장에서 감상했다. <아가씨> 같은 경우 이전 글에서도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 한 바 있고, <올드보이>는 '당시에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충격을 안겨줬다. 이러한 그의 전작들에 비교하면 <헤어질 결심>은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절제된 작품이다. 전작들의 느낌과 에너지를 기대했었어서 이번 영화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박찬욱 감독은 박찬욱 감독임을 느꼈다.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주제인만큼, 흠잡을 곳 없는 그의 연출과 미장센도 한 층 더 고급스러워진 듯하다. 이번에도 역시 잘 쓰인 소설 한 편을 읽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뭐랄까, 개인적으로 깐느박의 전작들의 에너지가 조금 더 취향이다. 이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입맛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차기작은 살짝 더 매운맛으로 만나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품위 있는 단일한 감독, 박찬욱은 매번 나의 심장을 가져가 버린다.


★:4.5/5


Copyright 2022. 인턴작가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그 시절 홍콩, 유난히 순수했던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