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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턴작가 Aug 31. 2022

아프고도 찬란했기에 아름다웠던 시간들 <화양연화>

<화양연화 / 花樣年華> (2000) 리뷰

"그녀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건 이삿날이었다.

그녀와 난 바로 옆집이었고, 공교롭게도 우린 이삿날이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첸 부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화려한 치파오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우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꽤나 자주 마주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첸'씨는 출장이 잦은 듯하다.

요즘 나의 아내도 야근이 잦다.

이것은 우연일까? 우연이겠지.


자주 가는 국숫집에서 그녀와 계속해서 마주친 지도 꽤 됐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슬프고, 어딘가 외로워 보인다. 나처럼.

그녀가 좋아한다던 무협 소설을 다시 쓰고 싶어졌다.


첸 부인은 눈웃음이 참 매력적인 여자다.

그녀가 내 작업실에 놀러 오는 날이면 그녀의 그러한 눈웃음에 빠져 나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소설을 다 써 갈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도 깊어지는 것 같다.

큰일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얼마 뒤, 나는 홀로 싱가포르로 향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그녀를, 그녀의 가정을 지켜주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우리는 이별을 위해 연습을 했고, 그녀가 울었다.

연습일 뿐이라며 그녀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 생각이 자주 난다는 것 빼고 싱가포르 생활은 꽤 순조로웠다.

그녀가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된다.

어젯밤 내 숙소에 누군가 다녀간 듯하다.

항상 높은 구두를 신어 발이 아플 그녀를 위해 샀던 슬리퍼가 사라졌다. 대체 누가..?


홍콩으로 돌아가 구 씨 아저씨께 인사도 드릴 겸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가봤다.

구 씨 아저씨는 계시지 않았고, 그녀 또한 없었다.

우리의 추억이, 우리의 시간이 멈췄다.

이제 이 소설의 마무리를 지을 때가 온 듯하다.


나는 캄보디아의 한 오래된 사원을 찾았고, 나의 화양연화를 그곳에 묻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잡초와 흙으로 꼼꼼히 메꿨다.

비록 그녀와 나의 시간은 멈췄지만, 그 속에서 영원하길.

오랜 시간이 지나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아프지만 찬란했기에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2000년에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각각 배우자가 있는 차우와 소려진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배우자 간의 외도 의심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솔직히 뭐 때문에 시작됐는지와 같은 것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차우와 소려진은 엄연한 '불륜 관계'다. 이들의 사랑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 모순적일 수도 있겠으나, '사랑'이라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자체는 잘못이 없지 않은가. 왕가위 감독은 불륜 관계에서 커져 가는 사랑의 감정을 <화양연화>에서 애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차우와 소려진의 사랑이 더욱 아름답게 빛 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커서 차마 함께 도망갈 수 없었고, 각자의 가정을 지켜주기로 한다. 그리고 훗날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화양연화'를 추억할 뿐이다.


'차라리 그들이 훨씬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차우와 소려진의 사랑은 미결이어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때로는 미결인 것들이,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아프고도 찬란했기에 아름다웠던, 그때 당시의 감정과 시간 멈췄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있다.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인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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