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만 좋으면 장땡인 줄 알았던 90년대 영어 키드

나는 대체 왜 한국에서 태어난 거야 ㅠ

by 통역사 캐롤

나의 엄마는 극성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어떤 학원에 나를 보냈다. 당시에는 아주 드문, 원어민들이 10명 내외의 정원으로 가르치는 영어학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기업에서 예비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학 강의를 위탁하는 곳이기도 했다. 학원은 시청역에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신설동역에서 1호선을 타고 시청역까지 꼭 다섯 정거장을 가야 했다. (당시에는 동묘앞역이 생기기 전이라 신설동 다음은 동대문역이었다.) 우리 엄마는 워킹맘이었기 때문에 전업주부였던 친구 어머니가 친구와 나를 데리고 학원을 왕복해 주셨다. 여의치 않은 경우엔 혼자 지하철을 타고 다섯 개 역을 거쳐 학원에 가곤 했다. 어린이표 열 장과 5천 원이 든 비상 전화카드를 넣은 지갑을 가지고. 어떻게 초등학교 저학년을 혼자 지하철 타고 다니게 했을까? 90년대생은 강하게 컸다.


학원에 처음 들어간 건 5월이었는데, 11월 말에야 겨우 진급해서 윗반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학원에서 주는 조그만 카드에 다소 알아듣기 힘든 단어가 쓰여 있었고, 단어가 길면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걸. 'Unsatisfactory'라고 적혀 있던 카드를 엄마는 흘깃 보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셨다. 11월이 되어서야 'Good'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렇게 겨우 기초반을 두 번이나 유급하고 위로 올라갔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매일매일 단어를 외우고 시험을 보는 시스템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쪽지시험을 본다는 개념을 잘 몰랐다. 게다가 선생님은 한국어를 전혀 못 해서, 아무리 내 눈을 보고 영어로 말을 해줘도 이해를 못 했다. 시험은 백지로 내고, 수업이 진행되는 한 시간 동안 정말이지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학부모 참관 수업 날이 되었고, 수업을 마친 후 엄마의 표정은 몹시 굳어 있었다.


애써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엄마가 차갑게 물었다.

"너 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 안 듣고 다른 데 보고 있었어?"


"무슨 말하시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억울했다.


"선생님이 book, girl, 이런 단어들 외워 오라고 하시는 거 들었어?"

"몰랐어."

"정말 몰랐어?"

"......"


엄마는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원만 보내 놓는 것이 아니라 잘 배우고 있는지 적당히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는 그때 처음 깨달은 것 같다.


그때부터였다. 엄마와의 출근/등굣길 차 안에서 나는 엄마와 함께 단어 스펠링을 외우기 시작했다. 엄마가 "북!"이라고 하면 나는 "비, 오, 오, 케이!"라고 대답했다. "바나나!" "비, 에이, 엔, 에이, 엔, 에이." 이렇게 외우는 것이 은근히 리듬감이 있는 데다 어려서 그랬는지 정말 잘 외워졌다. 별다른 챈트나 노래도 아니었지만 나는 단어를 무지 빨리 외웠다. 처음에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시던 선생님도 내가 에이스로 거듭나고 나서는 다정한 눈빛을 보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가 나의 영어 인생의 산뜻한 출발점이자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다는 것에 과몰입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주어가 단수이면 동사는 복수 형태(s)가 되고, 반대로 주어가 복수일 경우 동사는 원형이 되는 영어의 기본적인 법칙이라든지, 명사 앞에 왜 정관사 'the'나 부정관사 'a'가 붙어야 하는지 배운 기억이 도무지 없다. 원어민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설명의 필요조차 인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어에 없는 영어만의 기본적인 규칙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넘어가지 못했던 대가를 몇 년 후에 혹독하게 치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나날이 늘어가는 어휘력에 스스로 뿌듯해할 뿐이었다. 원어민 선생님께 멋진 발음까지 제대로 습득해서, 짧은 영어라도 자신 있게 원어민과 소통하는 태도가 생겼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바로 "알아듣기만 하면" 만족하는 것이었다. 원어민들이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어색한 말이지만, 어쨌든 무슨 뜻인지는 통했으니 넘어가는 원어민 선생님들의 태도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렇게 그 학원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지만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는 학교에 없었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그룹과외에서도, 학원에서 배우는 것도 나에겐 너무 쉬웠다(고 생각했다). 앵무새처럼 외운 문장들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뿐이었는데도, 나는 그 동네 에이스로 초등학교 5학년까지 자신만만하게 자랐다.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은 5학년 때 처음으로 엄마, 동생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였다. 공항에서 마주한 직원들 중 단 한 명도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외웠던 말들은 신선하지만 지금 하려는 요리에는 아무 짝에도 필요 없이 굴러다니는 냉장고 속 식재료 같다는 것을.


-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