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영어 에이스는 사실 왈도체밖에 몰랐대요~
나는 스물한 살 때부터 과외를 했다. 처음 과외를 삼성동에서 시작해서 논현동, 청담동, 반포, 도곡동까지 다녀 봤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르쳐 본 학생만 나름 10여명 된다. 주로 학원 숙제를 도와주는, 이 동네들에선 흔한 과외를 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대치동 빅 3 학원 중 한 곳에 다니던 나의 과외 학생은, 학원의 페이스에 따라가기에는 부족했다. 빅 3 합격까지는 했지만, 이미 해외에 살다 왔거나 영어유치원 출신인 아이들에 비하면 따라가기 버거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은 5학년이었는데 학원의 수업과 과제 수준은 미국의 중1, 중2 정도 수준이었다. 내가 보는 학생의 수준은 미국 4학년 수준이었다.
사실 그 정도면 뛰어난 학생이었다. 머리도 좋았다. 단지 학원의 선행학습이 지나쳤을 뿐이다. 어찌 보면 그런 엘리트 양성소를 표방하는 학원일수록 운영하기 쉬울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 그 학원에 다녀서 성과가 안 나오면 학원의 잘못이 아니다. 낙오되는 학생이 수준 미달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간판 센 학원에 다닌다는 자부심 때문에, 아이가 버거워해도 거길 그만두는 것은 너무 아깝다. 어떤 학부모는 대놓고 '학원에 다시 복귀할 때까지만 실력을 끌어올려달라'라고 주문했다.
우리 엄마도 선생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모습을 보면 비슷했던 것 같다. 좋은 학원에 보냈으니, 실력 있는 선생님께 맡겼으니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영어실력을 육각형으로 그린다면 심각하게 뒤틀린 육각형이 된다는 것을 엄마는 정말 오랫동안 몰랐다.
(누군가는 엄마를 원망하는 것처럼 해석하실 것 같아서 분명히 말하자면,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과거를 이렇게 냉정하게 반추하는 이유는 원망하지 않기 때문에 더 가능하다. 엄마는 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와 지원을 하셨다. 문제는 엄마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진짜 현실을 회피하던 나였다.)
때는 2001년, 우리 가족은 이민을 결정하고 도미했다. 친척 중 두 집이나 캐나다 영주권을 받고 이민을 간 것에 부모님은 엄청난 자극을 받고 큰 결단을 내렸다.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그냥 흔한 기러기 형태로, 엄마랑 동생과 나는 미국으로 떠나고 아빠는 한국에 남아서 계속 직장을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아빠 없이 비행기를, 그것도 태평양을 건너가는 국제선을 탔다. 비행시간은 초등학생이었던 우리에겐 정말 끔찍하도록 길었다. 게다가 국적기가 아니라서 한국 영화를 틀어도 아래에 중국어 자막이 나오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거슬렸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내가 받은 미션은, 비행기가 왜 지연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비행기는 지연되었는데, 물론 한국이었다면 안내방송을 듣고 파악하면 되었겠지만. 엄마는 자꾸 나에게 "우리 셋 중 네가 영어를 제일 잘하니까 이젠 네가 우리를 인도해야 해."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부담을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주었다. "내가...? 나도 아무 말도 못 알아듣겠는데."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왜 그때 나도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며 뭐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까. 25년 전의 K-장녀였던 나를 토닥거려 주고 싶다.
"Hello, uh, airplane... why, late?"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겨우 짜내어 한 말은 저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비행기가 왜 지연인가요?"의 왈도체직역이다. (아마 전설의 왈도체가 세상에 나온 것도 2001년쯤인 걸로 안다. 그 분과 나는 동시대 사람...)
솔직히 내가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용기였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일단 있는 말 없는 말 쥐어짜서 묻고 싶은 말은 했고, 상대방은 실제로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 대답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키가 땅딸막한 항공사 직원은 말하는 나를 바라보며 짧게 툭 던지듯 대답을 했는데, 단 한 개의 단어도 못 알아들었다. 나는 아무런 소득이 없이 엄마에게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왜 늦어졌대?"
"그냥 늦어졌대." 나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이 어딨어."
"나도 잘 모르겠어 엄마." 나는 더 모기만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속으로는 '제발 이제 나한테 그만해!!'라고 말하면서.
25년 전의 그날을 복기해 볼수록 내가 가진 문제는 여러 가지였음을 알게 된다. 첫째, 나는 그때까지도 시제의 개념과 품사의 개념을 전혀 몰랐다. 한국어와 영어는 1부터 10까지 공통점이라고는 0에 수렴하는 언어였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모국어로 구사하는 한국어처럼 영어를 대했던 것 같다.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말에서 뭐가 이상한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별할 필요가 없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언젠가 저절로 내가 말하는 영어가 내가 말하는 우리말과 똑같이 들릴 거라고 마냥 생각한 것이다.
둘째, 회화의 building block이 되는 기본 문장들이 머릿속에 없었다. 이미 많이들 아는 방법이지만, 나는 문장을 외우는 방법이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모국어를 습득하는 원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엄마와 아빠와 그 외 세상 사람들이 해주는 말을 계속해서 들으며 산다. 처음에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반복해서 들을수록 의미를 유추하고 패턴을 학습한다. 이를테면, '아, 내 배가 꼬르륵거릴 때쯤 엄마는 나에게 '배고프지?'라고 말하는구나.' '내 배가 꼬르륵거리는 것은 배가 고프다는 거야. 그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거야'와 같다.
문법의 원리를 어려운 말을 써가며 설명하는 것은 나중에 머리가 더 크고 나서 하고, 일단은 수준에 맞는 영어 문장들을 잔뜩 외워야 한다. 무한 반복하며 음원을 들어도 되고, 학원에서는 dialogue 형태로 서로 한 5번 정도 주고받는 대화문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외우고 무작위로 지명해서 시험을 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하여튼 나는 내가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는 문장들을 모르는 채로 미국에 갔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셋째, 실제 원어민은 어떤 말투로, 어떻게 말하는지를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한다. 왜 나온 지 40년이 다되어가는 미드 '프렌즈'가 아직도 올타임 명작으로 평가받는지는 '프렌즈'를 본 사람들만 알고 있다. 프렌즈는 정말 지극히 미국적인 드라마다. 일상생활의 티키타카에서 쓰는 말들이 모두 나온다. 재밌는 건 정말 '미국적'인 농담과 '미국적인 정서'의 대답들, 이를테면 농담을 받아치는 말들은 도저히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으로선 배우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이다.
미국 문화를 알아야 웃긴 말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야구팬들만이 아는 밈이 있듯이. 그래서 한국에서 실컷 영어 쓰고 고전 책 읽고 독후감 쓰고 영어유치원, 영어학원에서 시키는 것들 해도 영어가 좀체 안 는다면 그것은 그냥 '재미없는 것만 하니까' 그렇다. 재밌는 만화도 보고 영화도 보면서 영어와 내가 서로 '상관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실제로 원어민을 만나도 책으로 배운 영어가 아니라 실생활 영어를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영어에서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잘 굴리고 이런저런 사물의 이름을 영어로 많이 알고 있으니 잘 배우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나의 문제를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나의 부족한 점을 엄마는 모르고 계셨다. 질문 몇 개만 던져도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나를 가르쳐주신 과외 선생님께 아쉬울 따름이다. 어리니까 크면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 20대 선생님이 되어 대치동, 반포, 삼성동, 청담동 등에서 과외를 하며 나는 항상 "이 단어 앞엔 왜 the를 쓰고, 여기엔 왜 a를 쓰고, 이 단어 앞엔 왜 아무것도 없는지 아니?"와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꼭 말해줬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면 돼. 왜냐면 지금부터 배울 거니까!"
갑자기 급 글을 마무리하는 것 같지만, 이 세상 모든 선생님들이 친절하게 모르는 것을 설명해 주는 선생님이면 좋겠다. "모르면 막 물어봐. 몇 번씩 계속 물어봐도 괜찮아."라는 말이 학생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지. 그런 면에서 나는 AI로 인해 가장 빨리 대체될 직종이라며 언론에서 조롱하는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동시에 AI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모르는 게 있으면 사람에게 면박받고 쪽팔려할 걱정 없이 ChatGPT에게 물어보고 있으니까.
언젠가 어느 유튜브에서 본 적 있다. 사교육 없이 자녀에게 성공적으로 영어교육을 하신 분인데, 아이들에게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너, 저 말 들으면 다 알아듣니?"라고. 자꾸 아이가 하는 것을 '검사'하지 말고, 그냥 같이 말하고 같이 노래 부르다 보면 아이가 어떤 부분을 아직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 그때 같이 공부하면 된다. 선생님은 아이의 부족함을 학부모이게 상담하면 언짢아할까 우려하고, 실력 부족은 결국 자기 책임이 될까 봐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아이의 상태를 인지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다시 back to basics로 갈지, 아니면 사상누각처럼 계속해서 레벨업만 추구할지. 확실한 건, 사상누각으로 쌓아 올린 영어 실력은 언젠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해야 한다. 난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통대 입시에서 저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 여러 명 봤다. 거기엔 나도 포함.
- 다음 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