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몰랐을 세상
지난주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 2025를 맞아 한국을 방문한 이더리움 공동 창업자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블록체인 통역이라고 해봐야 예전에 회사에서 우연히 대신 들어간 회의가 전부였기에, 준비 기간 내내 블록체인 관련 글과 영상을 파고들며 지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그 세계에 몰입해 보낸 셈이다.
이틀 동안 그분과 동행하며, 또 지난 10년간의 수많은 인터뷰를 찾아 들으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블록체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나 권력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에 훨씬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연히도 그 전날에도 블록체인 업계 행사에서 통역을 했는데, 두 집단의 분위기와 관심사는 극명하게 달랐다. 같은 산업을 이야기하는 듯 보였지만,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듯했다.
일을 마친 뒤에는 얼마전 유튜브에서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수업에 대해 본 영상이 떠올랐다. 영상에 따르면 새로운 플랫폼이나 서비스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을까?”가 아니라 “사람들은 무엇을 불편해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 없이는 좋은 기술도 사용자에게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주지 못할 수 있다. 사용자가 느끼는 불편을 살피고 사용자에 "공감'하려는 노력이 제작자의 가장 중요한 몫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분은 단단하고 우직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엄청난 부와 성취를 이룬 블록체인 업계의 구루이면서도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는 누구도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는 사회, 모두가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에라도 선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기술로 구현하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건 그의 말에 숫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늘 거래량이나 사용자 수로 성과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숫자가 아닌 철학과 방향만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트렌드를 파악하고 무슨 코인을 사야 할 지 궁금해서 오는 컨퍼런스에서, 철학과 비전만을 이야기하는 그는 사업가라기보다는 선지자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일이 끝나면 블록체인 공부는 그만하려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다음 날 아침 운전하는 길에도 무심코 블록체인 팟캐스트를 들었다. 처음으로, 블록체인이 바꾸어 갈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알고 싶어졌다.
이런 통역경험 때마다 나는 과연 통역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지식을 언젠가는 알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요즘처럼 알고리즘으로 내가 접하는 컨텐츠 전부가 큐레이션인 세상에서, 나는 이 지식을 과연 접할 수나 있었을까? 블록체인위크 행사장에서 피크타임 가장 혼잡한 2호선 잠실역 수준의 인구 밀집도를 보고는 경악했다. 내가 집에서 야구 관련 영상만 찾아 보는 사이 누군가는 동일한 플랫폼에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을 공부하고 있었다니...
안정과 익숙함을 추구하는 내향인인 나에게 통역사의 일은 너무 버겁지만, 그래서 나의 comfort zone을 깨고 전혀 새로운 것을 만나게 해 준다. 이렇게 나의 시야는 매일 조금씩 넓어지고, 나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며 성장한다. 편한 것만 찾았던 나였기에, 항상 새로운 것을 접하고 빠르게 익혀야 하는 통역사가 된 것은 복인 것 같다. 통역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헛똑똑이로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전에는 "이것도 몰랐네 난" 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이런 것도 있구나!"라며 얼른 지식을 주워담는다. 배우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모르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