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평범하게 잘하는 통역사가 되자

스타 통역사는 아닐지라도

by 캐롤

대학원에 들어가고 4월쯤, 제대로 현타가 왔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서 들어온 곳이었지만, 동기들은 뛰어났다. 나는 알면서도 실수했고, 지적받았다. 피드백을 묵상하다 보니 암담해지다 못해 다 그만두고 싶었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막상 들어오니 진짜 넘어야 할 산은 남들보다 못한 자신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교수님과 면담을 하다 솔직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는 아무래도 재능은 없는 것 같아요. 뛰어난 친구들이 정말 많은데 제가 여길 나와서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교수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누리씨는 자기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요. 정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노력까지 하면 업계 최고의 통역사가 되겠죠. 그런데 꼭 업계 최고의 스타 통역사가 될 필요는 없어요. 그저 맡겨준 일 잘하는 좋은 통역사가 되면 됩니다. 본인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시험에 합격해서 들어왔다는 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뛰어나지 않다는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으면 좋겠어요. 최고의 통역사는 다른 사람이 할지라도, 본인은 잘하는 통역사가 되세요."

T에게는 최고의 위로였다. 최고가 아닐 수 있다. 최고가 아니어도 된다. 네가 할 일을 해라.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내가 가진 것을 긍정하기보다는 남의 뛰어남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나는 왜 잘하지 못하는지, 왜 뾰족한 재능이 없는지 늘 스스로를 작게 여겼다.
프리랜서가 된 지금, 일거리를 기다리며 조증과 우울증을 오가는 가운데 오랜만에 그때 그 교수님의 T스러운 조언이 떠오른다.

불안을 견디던 5월의 어느 날, 우연히 '불꽃야구'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불꽃야구에는 영구결번을 남긴 대스타도 있지만, 20년 넘게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히 준수한 성적을 낸 선수들도 있다. 나 같은 야알못은 이대호나 추신수 정도만 알았지 정성훈, 정근우, 김재호 같은 선수들은 솔직히 몰랐다.
그러나 이들은 근 20년간 철저하게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냉정한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이다. 영구결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실력을 인정받고 프로 선수로 롱런했다.
야구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높은 메타인지다. 이들은 자신의 "급"을 정확히 알고 있다. 노장 선수들은 자신을 엄청난 커리어를 남긴 대스타와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포지션에서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몫을 해낸다.
집중해서 잘 잡은 공으로 만든 아웃 카운트 하나에 기뻐하는, 어찌 보면 소소해 보이는 그 모습이 어떤 안도감을 주었다.
누구나 아는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최고로 잘하지 않았을지라도 상관없다. 열심히 살았고 무언가에 기여했다면 잘한 것 아닌가.

이른바 스타 동시통역사로 이곳저곳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좋은 회사도 다녀봤고 그 덕분에 특별한 경험도 많이 했다. 아직도 통역을 하면 마음에 안 들고 힘들 때가 많다. 언제쯤 더 잘하게 되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다른 직무로 커리어를 시작할걸, 이라는 후회는 솔직히 하루 걸러 한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것은 어제보다 오늘 나는 조금 더 영어를 잘하게 되고 있다는 거다.

20년 넘게 한결같이 타석에 들어섰던 선수들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꾸준한 사람들의 몫이 더해지고 전달되어 세상이 굴러가듯, 아직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나는 앞으로도 최고의 통역사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믿을 만한 통역사는 되어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블록체인이 바꿀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