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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잘 쳤다고 할지라도(feat. 김성윤)

안타 치고도 자기 머리를 때리는 선수... 프로 마인드란 이런 것일까

by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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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은 가을야구를 보는 소소한 재미로 버티고 있다. 오늘은 손꼽아 기다리던 플레이오프 1차전이 있던 날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끝까지 집중 시청했다. 언터처블한 구위로 162km의 공을 연달아 뿌려대며 타자들을 삼진으로 허탈케 하는 투수 문동주의 컨디션은 가히 놀라웠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보다도 신선했던 장면은 8회에서 찰나의 순간 중계에 포착된 김성윤 선수의 모습이었다. 안타를 치고 1루 베이스에 도착한 직후 세리머니 손짓을 하자마자 바로 헬멧을 쓴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장면이었다.

김성윤이 때린 공은 내야를 살짝 벗어나 좌익수와 유격수 사이 절묘한 위치에 톡 떨어졌다. 수비하던 좌익수와 유격수가 거의 부딪칠 뻔하며 달려갔지만 공을 잡지 못해 안타가 되었다. 삼성이 2점 뒤지는 상황에서 출루가 절실한 상황, 김성윤은 중요한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직후 1루에 도착한 김성윤이 석연찮다는 표정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는 모습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해설위원은 "안타를 쳤지만 본인은 타이밍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라는 해석을 했다.

안타를 쳤으니 좋아할 법도 했지만 김성윤 선수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얻은 것이 아니라 요행으로 얻었던 결과에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밖에 못 치냐'라고 자책하며 바가지 안타였다고 스스로 평가절하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안타가 된 그 기록을, 자기 머리를 때리며 못마땅해하는 모습을 중계로 봤을 때, 나는 순간 어떤 존경심이 들었다. 자기가 만족할 정도로 잘하는 게 프로의 세계이고, 남이 결과를 인정해 줘도 자신의 순실력과 그 결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야구라는 스포츠의 내면과 선수들의 심리를 차츰 알게 되며 야구에 매료된 것 같다. 통역사라는 직업은 사실 음악가들이나 운동선수들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선수라면 누구나 기본기는 있지만, 꾸준한 개인 훈련과 연습 게임이 필요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멘탈이 무너지거나 어느 한쪽에 과몰입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입스가 와서 공을 던지지 못하는 어떤 선수의 스토리는 도무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게 마음이 아렸다.

어떤 선수들은 별생각 없이 "육감적"으로 공을 맞혀 안타를 만드는가 하면, 어떤 선수들은 너무 생각하고 분석하는 나머지 섣불리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다가 어이없이 삼진 아웃을 당하기도 한다. 어떤 타자들은 삼진 아웃으로 뒤돌아서며 "아, 공 좋네"라고 내뱉고 돌아가는가 하면, 어떤 타자들은 "야 이 바보, 멍청아, 그것도 못 맞히냐!"라며 스스로 자책하기도 한다.

통역도 마찬가지다. 끝나면 아웃풋과 상관없이 지나간 일이니 깨끗이 잊어버리는 통역사도 있지만, 아쉬웠던 부분을 스스로 무한 반복 재생하며 한숨 쉬고 각성하는 통역사도 있다. 어떤 통역사가 더 나은 퍼포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서로 다른 유형의 야구 선수라도 성적은 둘 다 뛰어날 수 있다.

나는 결과론자다.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속이 상하기는 해도, 내가 미진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한 것보다 과분한 결과를 얻었을 때다.

학업을 마치고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 순실력에 비해서는 언제나 과분한 회사에 들어갔다. 테스트와 면접에선 진땀을 흘렸고, 마치고 나면 창피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뜻밖에 최종 합격을 하고 회사에 출근하면 그래도 내가 들어올 만해서 들어왔나 보다는 생각을 하며 면접 흑역사는 잊고 안일해지기도 했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니, 실력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의 부담감을 한 5배쯤 느끼는 것 같다. 특히 나를 믿고 일을 맡기는 고객은 그 한 건으로 나라는 통역사가 이른바 "돈값"하는 통역사였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아무튼 오늘 김성윤 선수의 안타 리액션으로 좋은 자극을 받았다. 길게 써제꼈지만 요약하자면 '건설적 과정론자'란 어떤 모습인지 본 것 같다. 100점을 받은 시험에서도, 찍은 한두 개의 문제를 운 좋게 맞혀서 100점을 받은 것임을 시인하는 것이 진짜 프로의 모습이 아닐까.

못한 일뿐만 아니라 잘한 일에서도 결과를 자가 피드백하는 것은 단지 직업인이라서가 아니라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평생 과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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